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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시정연설···'공정' 27번 외쳤지만 '조국' 언급은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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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국회에서 취임 후 네 번째 시정연설을 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2분부터 35분까지 9000여 자 분량의 연설문을 읽어내렸다. 시정연설은 고도의 정치 행위다. 국민의 세금으로 구성된 이듬해 예산안의 용처와 배경, 당위성에 대해 대통령이 ‘민의의 전당’에서 설명하는 기회여서다.

국회에서 네 번째 시정연설 #“저성장 해결 재정이 앞장서야” #공정 강조…검찰개혁·공수처 역설 #야당 “고집불통 대통령 확인” #작년엔 공정보다 포용 많이 언급 #비서진에 “공정 강조” 직접 지시 #“공수처 있었으면 국정농단 없어” #강한 톤으로 개혁 의지 피력

◆시정연설 초점은=전체 연설의 3분의 2가량인 6000여 자 분량을 정부 예산안의 배경과 당위성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이를 꿰뚫는 핵심 용어는 나랏돈을 더 쓴다는 의미의 ‘확장 재정’이다. 연설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저성장과 양극화, 일자리, 저출산·고령화 등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 해결에 재정이 앞장서야 한다.” “우리가 지금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머지않은 미래에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된다. 내년도 확장예산이 선택이 아닌 필수인 이유다.”

정부는 내년도 예산에서 총지출은 올해보다 9.3% 늘어난 513조5000억원 규모로, 총수입은 1.2% 늘어난 482조원으로 31조5000억원의 적자 편성을 했다. 정부 씀씀이를 키워 경제를 돌리겠다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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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이슈는 공정을 화두로 연설을 풀어갔다.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를 엄중한 마음으로 들었다”는 데서 보듯 직접 언급은 않았지만, 이른바 ‘조국 국면’을 염두에 뒀다. 특히 조 전 장관의 자녀 입시 논란을 의식해 “국민께서 가장 가슴 아파하는 것이 교육에서의 불공정이다. 정시 비중 상향을 포함한 ‘입시제도 개편안’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조국 국면의 한 축이었던 검찰 개혁 이슈에는 “국민을 위한 기관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때까지 개혁을 멈추지 않겠다”고, 정가의 뜨거운 감자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논란에 대해서는 “권력형 비리에 대한 엄정한 사정 기능이 작동하고 있었다면 국정농단 사건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와 뭐가 달라졌나=예산안 처리를 당부하는 시정연설인 만큼 매해 연설의 핵심 키워드는 경제다. 각각 올해 29차례, 지난해 27차례 경제를 언급했다.

두 번째로 올해 ‘공정’이란 단어를 27차례(불공정 등도 포함) 언급했는데, 지난해 10차례에서 3배 가까이 늘어났다. 지난해의 경우 문 대통령은 경제에 이어 포용(18차례)을 강조했었다.

공정이 핵심 키워드가 된 것은 올 하반기 정치권과 광장을 달군 ‘조국 국면’이 결정적이다. 문 대통령은 특히 ‘반칙·특권 외 제도 내 불공정 개혁’을 강조해 왔는데, 관련 언급은 이날도 반복됐다.

국회 찾아 공정 27번 강조…야당 “조국 사과 한마디 안해”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시정연설을 마친 뒤 자유한국당 의원들과 악수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연설 직후 대부분의 한국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을 빠져나가자 급히 따라가 인사를 나눴다. 변선구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시정연설을 마친 뒤 자유한국당 의원들과 악수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연설 직후 대부분의 한국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을 빠져나가자 급히 따라가 인사를 나눴다. 변선구 기자

“국민의 요구는 제도에 내재된 불공정과 특권적 요소까지 없애달라는 것이었다.”(9월 9일, 조 전 장관 임명장 수여식)→“불법적인 반칙·특권뿐 아니라 합법적 제도 속에 내재된 불공정까지 모두 해소하라는 게 국민 요구.”(10월 21일, 종교지도자 오찬)→“국민의 요구는 제도에 내재된 합법적인 불공정과 특권까지 근본적으로 바꿔내자는 것이었다.”(22일, 시정연설) ‘혁신적 포용국가’의 두 핵심 단어인 혁신과 포용도 빈번하게 등장했다.

◆누가 썼고 대통령 지시는=통상 3·1절이나 8·15 연설 등은 비서실장 주재로 연설문 초안을 잡는 데 반해 국회와 관련해선 청와대 내 주무부서인 정무수석실에서 주관한다. 이번엔 강기정 정무수석이 각 부서와 정치권 의견을 수렴해 서너 차례 회의를 주재하며 총괄했다고 한다. 3주 정도 걸렸다.

여느 때와 달리 작성 전부터 문 대통령의 구두 지시가 많았다고 한다. 청와대 참모들이 뜻을 모아가면 대통령이 최종 가필하는 통상적인 절차가 아니라 사전에 강조점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특히 강조한 건 ‘공정’이었다. 문 대통령은 “국민의 요구를 깊이 받들어 ‘공정’을 위한 ‘개혁’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초기 단계부터 공수처, 검찰 개혁 등 이슈에 강한 톤으로 개혁 의지를 피력했다고 한다. 한 참모는 “공정 관련 강조를 많이 했다. 이번에 느끼신 게 많은 것 같더라”고 전했다.

◆문 대통령 생각 변했나=시정연설을 시종 꿰뚫는 두 가지 핵심 화두, 확장 재정과 공정은 문재인 정부의 두 축이다. 청와대 주변 참모들 말을 종합하면 문 대통령의 생각, 국정 철학은 더 확장됐고, 더 강고해졌다.

연설문의 공정은 혁신과 포용, 평화의 뿌리도 공정이고, 경제뿐 아니라 사회·교육·문화 전반에서 새롭게 구축돼야 할 가치도 공정이다. ‘포스트(post) 조국’의 공정은 또 합법적인 제도 내의 불공정 해소로도 확장됐다.

개혁을 위해선 정면대결도 불사하겠다는 입장도 피력했다. 공수처 외에 검찰을 견제할 대안이 없다고 규정할 때부터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야유가 나왔지만, 문 대통령은 되레 그쪽을 쳐다보며 “권력형 비리에 대한 엄정한 사정 기능이 있었다면 국정농단 사건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짧게는 정기국회, 길게는 내년 총선, 더 길게는 남은 임기 2년 반을 앞두고 ‘마이 웨이’를 다시 한번 천명했다. 국회와 “함께하겠다”가 아닌 “함께하고 싶다”란 표현에서 보듯 ‘정치 탓’ ‘국회 탓’도 여전했다. “조국 대란에 대한 사과와 반성도 한 마디도 없었다. 고집불통 대통령이란 사실만 확인했다”(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말이 맞을지도 곧 판가름난다.

권호·위문희 기자 gnom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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