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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의식했나···"공정 강조하라" 文 지시 유독 많았던 시정연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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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2020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변선구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2020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변선구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국회에서 취임 후 네 번째 시정연설을 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 2분부터 35분까지, 9000여자 분량의 연설문을 읽어내렸다. 대통령이 연설할 기회는 많지만, 시정연설은 각별하다. 국민의 세금으로 구성된 이듬해 예산안의 용처와 배경, 당위성에 대해 대통령이 ‘민의의 전당’에서 설명하는 기회여서다. 각종 정치ㆍ사회 현안에 대한 입장과 당부도 밝히게 마련이다. 시정연설 자체가 고도의 정치 행위다.

①시정연설 초점은 뭔가

전체 연설의 3분의 2가량인 6000여자 분량을 정부 예산안의 배경과 당위성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이를 꿰뚫는 핵심 용어는 나랏돈을 더 쓴다는 의미의 ‘확장 재정’이다. 연설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저성장과 양극화, 일자리, 저출산·고령화 등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 해결에 재정이 앞장서야 한다.”

“우리가 지금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머지않은 미래에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다. 내년도 확장예산이 선택이 아닌 필수인 이유다.”

정부는 내년도 예산에서 총지출은 올해보다 9.3% 늘어난 513조5000억원 규모로, 총수입은 1.2% 늘어난 482조원으로 31조5000억원 적자 편성했다. 쉽게 말해 정부 씀씀이를 키워 경제를 돌리겠다는 취지다.

문 대통령은 “시스템반도체, 바이오헬스, 미래 차 등 신성장 산업에 3조 원을 투자하겠다”(혁신), “저소득층 어르신 157만 명에 대해 추가로 기초연금을 30만 원으로 인상하겠다”(공정), “병사 월급을 병장 기준으로 41만 원에서 54만 원으로 33% 인상하겠다”(평화) 등의 용처도 언급했다.

경제정책과 관련해 눈에 띄는 부분은 문재인 정부의 경제를 상징하다시피 했던 ‘소득주도성장’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청와대에는 비판이 집중되는 용어를 굳이 쓸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있다.

정치·사회 이슈는 공정을 화두로 연설을 풀어갔다.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를 엄중한 마음으로 들었다”는 데서 보듯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이른바 ‘조국 국면’을 염두에 둔 것이다. 특히, 조 전 장관의 자녀 입시 논란을 의식해 “국민께서 가장 가슴 아파하는 것이 교육에서의 불공정이다. 정시 비중 상향을 포함한 ‘입시제도 개편안’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조국 국면의 한 축이었던 검찰 개혁 이슈에 대해서는 “국민을 위한 기관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때까지 개혁을 멈추지 않겠다”고, 정가의 뜨거운 감자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논란에 대해서는 “권력형 비리에 대한 엄정한 사정 기능이 작동하고 있었다면 국정농단 사건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②지난해와 뭐가 달라졌나

예산안 처리를 당부하는 시정연설인 만큼 매해 연설의 핵심 키워드는 경제다. 각각 올해 29차례, 지난해 27차례 경제를 언급했다. 두 번째 키워드에서 지난해 시정연설과 올해 연설의 차이점이 확 드러난다. 올해 문 대통령은 ‘공정’이란 단어를 27차례(불공정 등도 포함) 언급했는데, 지난해 10차례에서 3배 가까이 늘어났다. 지난해의 경우 문 대통령은 경제에 이어 포용(18차례)을 강조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2019년도 예산안 처리를 위한 시정연설을 마친 후 인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2019년도 예산안 처리를 위한 시정연설을 마친 후 인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공정이 핵심 키워드가 된 것은 올 하반기 정치권과 광장을 달군 ‘조국 국면’이 결정적이다. 문 대통령은 특히 ‘반칙·특권 외 제도 내 불공정 개혁’을 강조해왔는데, 관련 언급은 이날도 반복됐다.

“국민의 요구는 제도에 내재된 불공정과 특권적 요소까지 없애달라는 것이었다.”(9월 9일, 조 전 장관 임명장 수여식) → “불법적인 반칙·특권뿐 아니라 합법적 제도 속에 내재된 불공정까지 모두 해소하라는 게 국민 요구.”(10월 21일, 종교 지도자 오찬) → “국민의 요구는 제도에 내재 된 합법적인 불공정과 특권까지 근본적으로 바꿔내자는 것이었다.”(22일, 시정연설)

이른바 ‘소주성’, 즉 소득주도성장 대신 청와대가 즐겨 쓰는 ‘혁신적 포용국가’의 두 핵심 단어인 혁신과 포용도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지난해와 올해 양상이 다르다. 혁신을 언급한 횟수는 지난해 12차례에서 올해 20차례로 그 빈도가 늘었지만, 포용은 되려 18회에서 14회로 줄었다.

4차산업이 일상을 지배하는 요즘, 제2의 벤처 붐을 일으키겠다는 건 문재인 정부의 핵심 목표 중 하나인 점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혁신의 힘이 살아나고 있다”, “혁신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고 자평했다.

③누가 썼고 대통령은 어떤 지시를 했나

정무수석실 주관으로 3주간의 준비.

이번 연설문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개략적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통상 3·1절이나 8·15 연설 같은 경우 비서실장 주재로 연설문 초안을 잡는 데 반해, 국회와 관련해선 청와대 내 주무 부서인 정무수석실에서 주관한다. 이번에는 강기정 정무수석이 각 부서와 정치권의 의견을 두루 수렴해 3~4차례 회의를 주재하며 실무 작업을 총괄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느 때와 달리 이번 시정연설문은 작성 전 단계부터 문 대통령의 구두 지시가 많았다고 한다. 청와대 참모나 비서진들이 상향식으로 뜻을 모아간 뒤 최종 가필하는 통상적인 절차가 아니라, 사전에 문 대통령이 강조점을 미리 제시했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특히 강조한 건 ‘공정’이었다. 문 대통령은 초기 단계부터 공수처, 검찰개혁 등의 이슈에 대해 강한 톤으로 개혁 의지를 피력했다고 한다. 한 참모는 “공정 관련해서 강조를 많이 했다. 이번에 느끼신 게 많은 것 같더라”고 전했다.

예산안에 대해서도 문 대통령은 “단순히 얼마를 책정했다는 식으로 건조하게 하지 말고, 국정 철학을 담아서 설명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고교 무상교육 예산의 경우 “올해 고3부터 시작한 고교 무상 교육을 내년에는 고2까지 확대하고, 내후년에는 전 학년에 적용해 고교 무상 교육을 완성하겠다”는 연설문의 대목도 공정성과 포용성이라는 철학이 담겼다는 설명이다.

④문 대통령 생각 변했나

시정연설을 시종일관 꿰뚫는 두 가지 핵심 화두, 확장 재정과 공정은 문재인 정부의 두 축이다. 청와대 주변 참모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문 대통령의 생각, 크게 봐서 국정 철학은 더 확장됐고, 더 강고해졌다.

‘조국 국면’ 이전까지 문재인 정부의 공정은 탈법과 불법 척결이었다. 적폐청산 작업이 이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포스트(post) 조국’의 공정은 합법적인 제도 내의 불공정 해소로 확장됐다.

연설문에서 적시된 공정은 혁신과 포용, 평화의 뿌리도 공정이요, 경제뿐 아니라 사회·교육·문화 전반에서 새롭게 구축돼야 할 가치도 공정이다. 문 대통령은 “국민의 요구를 깊이 받들어 ‘공정’을 위한 ‘개혁’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개혁을 위해선 정면대결도 불사하겠다는 입장도 피력했다. 문 대통령은 공수처 외에 검찰을 견제할 대안이 없다고 규정할 때부터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야유가 나왔지만, 문 대통령은 되려 그쪽을 쳐다보며 “권력형 비리에 대한 엄정한 사정 기능이 있었다면 국정농단사건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확장적 재정 정책도 마찬가지다. 문 대통령은 “재정 건전성을 우려하는 분도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재정과 경제력은 더 많은 국민이 더 높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데 충분할 정도로 성장했고, 매우 건전하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짧게는 정기국회, 길게는 내년 총선, 더 길게는 남은 임기 2년 반을 앞두고 ‘마이 웨이’를 다시 한번 천명했다. 국회와 “함께하겠다”가 아닌 “함께 하고 싶다”라고 한 표현에 압축돼 있듯 ‘정치 탓’‘국회 탓’도 여전했다. “조국 대란에 대한 사과와 반성도 한 마디도 없었다. 고집불통 대통령이란 사실만 확인했다”(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말이 맞을지도 곧 판가름난다.

권호·위문희 기자 gnom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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