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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베일 벗은 북한의 예술…“분단도 내 음악 열정 못막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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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탈북 피아니스트 황상혁 첫 단독 인터뷰 

지난 2월 노동당 중앙위 본부 별관에서 열린 북한 건군절 71주년 기념 공훈국가합창단 경축 공연.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집권 이래 각종 악단을 동원해 체제결속을 다지는 ‘음악정치’를 펼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지난 2월 노동당 중앙위 본부 별관에서 열린 북한 건군절 71주년 기념 공훈국가합창단 경축 공연.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집권 이래 각종 악단을 동원해 체제결속을 다지는 ‘음악정치’를 펼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북한에서 음악은 절대 권력자와 노동당에 복속된다. 작곡가와 연주자·가수를 비롯한 음악인들이 체제의 부름에 따라 작품 활동을 하고 무대에 서는 것이다. 잘 짜인 교향악단은 김정은 체제를 선전하는 레퍼토리로 해외 순회공연을 하고, 천재 연주자는 국제콩쿠르에서 ‘수령’의 배려에 감읍하는 수상 소감을 말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집권 첫해인 2012년 모란봉악단을 창단해 이른바 ‘음악정치’에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정은은 “혁명적 노래는 적의 심장을 꿰뚫는다”며 ‘노래폭탄’을 강조했다. 지난해 대남 유화 전술로 급선회하는 국면엔 가수 출신 현송월이 이끄는 삼지연악단을 서울에 파견했다. ‘친솔(親率)악단’이란 미명 하에 김정은의 총애를 받는 이들 일행은 우리 사회의 대북 경각심을 누그러뜨리는 첨병 역할을 했다.

5년 전 옌지에서 사라진 ‘황 교수’ #“이설주와 사제지간 보도는 오보” #평양서 고위층 자제 과외로 인기 #서울대 석사 마치고 공개 활동

북한 체제에서 음악·예술인들은 나름대로 안정적 생활을 보장받는다. 그런데 촉망받는 중견 음악인들이 북한 체제를 벗어나 탈북·망명의 길을 떠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김정은 집권 이후 은밀하게 번지고 있는 핵심 엘리트층의 탈북 행렬에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게 대북 정보 관계자의 귀띔이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은둔생활을 하거나 활동 여건이 나은 제3국으로의 재망명을 택한다. 한국 정착 5년여 만에 베일을 벗은 한 탈북 피아니스트를 만나 북한 음악계의 속사정을 들어봤다.

지난 2014년 6월 국내 언론과 일부 외신은 한 탈북 인사 관련 뉴스로 떠들썩했다. ‘북한 피바다가극단 소속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황모 교수가 중국 옌지(延吉)에서 사라져 행적이 묘연하다’는 보도였다. 교육 연수차 극단 단원 30여 명과 함께 현지에 체류하던 중 없어진 그를 찾기 위해 북한 대사관과 공안 당국에 비상이 걸렸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특히 북한 당국이 황 교수의 탈북 가능성에 대비해 중국 공안에 검거 요청 공문까지 보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황 교수’의 신상에 관심이 쏠렸다.

일각에선 그가 김정은의 부인 이설주와 각별한 관계였다는 관측을 제기하며 북한의 이례적인 체포 움직임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더는 황 교수의 행방은 드러나지 않았고, 북한 당국도 추가 움직임은 없었다. 언론이나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잊혔다.

서울대 음대 석사과정 졸업 연주를 하는 탈북 피아니스트 황상혁씨.

서울대 음대 석사과정 졸업 연주를 하는 탈북 피아니스트 황상혁씨.

5년여의 세월이 흐른 지난 15일 기자의 핸드폰으로 자신을 ‘황 교수’라고 소개한 연락이 왔다. 오랜 기간 망설여왔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는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지하 식당가였다. 검은색 남방 차림에 백팩을 멘 그는 한눈에 봐도 특별한 탈북자인 듯했다. 큰 체구에 뽀얀 피부, 북한식 사투리가 전혀 섞이지 않은 말투가 그랬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북한의 음악 예술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적지 않고, 무엇보다 제대로 실력을 갖추지 않은 탈북자들이 피아니스트나 음악인으로 행세하고 있어 이를 바로잡고 싶었다”고 말했다. 북·중 접경도시에서 5년 전 사라졌던 ‘황 교수’가 처음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그는 몇 가지 팩트와 다른 게 있다고 했다. 우선 자신은 피바다가극단과 무관하다고 설명했다. 옌지에 머물던 일행 중 그 가극단 소속이 많았지만 자신은 평양음대 교수 자격으로 파견됐다는 것이다. 이설주의 스승이었다는 등의 일부 언론 보도도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황상혁(45)씨는 “한국 대사관에서도 ‘당신이 이설주와 무슨 관계냐’고 묻길래 의아하게 생각됐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궁금한 건 왜, 어떻게 한국 행을 택하게 됐는가 하는 점이었다. 황씨는 “동료들과 중국 옌지에 체류하던 중 우연히 한국 사람들과 어울리게 됐는데, 보위부가 이를 포착해 내사에 들어가면서 처벌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과거 해외 유학생 출신의 지휘자인 이동철이 독일의 한 맥줏집에서 한국인이 포함된 일행과 접촉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감옥살이를 하는 걸 본 뒤로 공포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황씨는 “평양의 공연장에서 악단을 이끌던 중 강제로 끌려나간 이동철은 3년형을 받고 폐인이 된 데다 가족마저 뿔뿔이 흩어졌다”고 전했다. 체코 출신의 유학생 송강은 외부 사조에 물들었다는 이유로 공연을 마친 뒤 곧바로 족쇄가 채워져 끌려나가기도 했다는 것이다.

해외에 나가는 북한 주민들은 ‘절대 접촉하거나 가지 말아야 하는 3국가’로 남조선(한국)·미국·이스라엘을 꼽는 지침을 받는다. 황씨는 “당초 미국이나 일본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만 안 가면 평양의 가족들이 다치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과 제3국을 거치는 과정에서 폐기흉으로 다른 국가로 옮겨져 큰 수술을 받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고 결국 한국으로 귀착됐다고 한다.

서울대 음대 석사과정 졸업 연주를 하는 탈북 피아니스트 황상혁씨.

서울대 음대 석사과정 졸업 연주를 하는 탈북 피아니스트 황상혁씨.

황씨는 지난 2003년부터 3년 동안 예술전문가 대표단으로 옌지에 머물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2011년 사망)이 “중국 동북 3성(헤이룽장성, 랴오닝성, 지린성) 지역의 조선족 동포들에게 우리 물을 먹여 공화국(북한) 판으로 만들라”는 교시를 내린 데 따른 파견이었다. 말이 예술대표단이지 실제로 한 일은 현지 사회예술양성센터 측과 계약을 맺고 조선족 어린 학생들에게 피아노 등 음악 과외를 하는 외화벌이 일이었다. 북한으로 돌아가 평양음악학원 피아노 상급교원으로 일하던 황씨는 2011년 1월 다시 옌지로 나왔고, 귀환을 며칠 앞두고 탈북·망명길에 올랐다.

황씨는 북한에서 잘나가는 피아니스트이자 평양음대 교수였다.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이용철의 손녀와 북한군 김광진 차수의 손자 등 최고위층의 자녀들이 그의 피아노 과외를 받으려 줄을 서야 했다. 성악곡 ‘압록강 2000리’를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데 이어 영화로 잘 알려진 ‘도시처녀 시집와요’의 주제가를 편곡해 각광받았다. 황씨는 “내가 탈북한 이후 모두 북한에서 금지곡이 됐다고 들었다”고 했다.

이렇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건 타고난 재능에다 든든한 집안 배경이 작용했다. 김일성·김정일 경호를 책임진 호위사령부 부부장을 지낸 외할아버지 덕분에 그는 평양 만수대의사당(우리의 국회의사당에 해당) 옆 서문동 5호관저 초대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9살 때 아들의 손을 잡고 평양학생소년궁전을 찾아 피아노 소조 활동을 시작하게 했다. 이 시절 그는 7차 차이콥스키 국제음악콩쿠르에서 특등상을 받은 바이올린 연주자 백고산과 함께 피아노 협연을 했고, 북한의 간판급 선전화보 ‘조선’에 실리기도 했다.

14살에 평양음악무용대 기악과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한 황씨는 북한 최고의 피아노 연주가이자 교육가로 알려진 이경린으로부터 사사(師事)했다. 1953년 소련 레닌그라드 국립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이경린은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남산의 푸른 소나무’ ‘빛나라 정일봉’ 같은 체제 찬양 피아노 독주곡을 창작해 38살에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

황씨에 따르면 북한의 클래식 음악 계보는 ▶한국 전쟁 당시 소련 유학을 다녀온 1세대 ▶1970~80년대 초 소련에서 기술을 전수받은 2세대 그룹 ▶1980년대 중엽부터 1993년까지 동유럽에 유학하거나 사회주의권 붕괴로 중도 귀환한 3세대 ▶2000년대 들어와 오스트리아 지휘 유학을 포함해 독일 등지에서 공부한 4세대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지난 5년간 황씨는 모든 공개활동을 접고 경기도 분당의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에 매진했다. 임대아파트에서 월 70만원 안팎의 보조금으로 버텨야 하는 곤궁한 생활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의 예술혼을 달래준 건 서울대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하며 경험한 한국과 서방 세계의 음악이다. 피아노에 대한 열정을 더는 억누르기 어렵다고 판단한 황씨는 이번 인터뷰를 계기로 초청 공연 등 공개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설 생각이다. 황씨는 “나는 그저 피아노를 연주하는 순수 예술인”이라며 “남북 분단이나 이데올로기는 나의 영역이 아니며 음악 열정 또한 막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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