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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한한 평양 남북축구, 결국 관중도 골도 없이 끝났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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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 평양 김일성 경기장에서 ‘0 대 0’ 무승부로 끝난 카타르 월드컵(2022년) 조별 예선경기는 결국 ‘북한 식’이었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대표팀이 15일 오후 5시 30분부터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북한과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H조 3차전을 무관중 경기로 치르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대표팀이 15일 오후 5시 30분부터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북한과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H조 3차전을 무관중 경기로 치르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남북한 축구 국가대표급 경기가 평양에서 열린 건 1990년 통일 축구 대회 이후 29년 만인데, 경기가 치러진 김일성 경기장에는 다른 월드컵 예선이 열린 경기장에선 볼 수 없는 진풍경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대회를 주관한 아시아축구협회(AFC)의 규정에 따라 방문팀인 한국의 애국가와 태극기가 경기 직전 게양됐다. 여기까진 정상이었다. 북한이 중계팀의 방북을 허용치 않으면서 생중계가 없으리라던 예상도 그대로였다. 취재진이 없다보니 기자회견에도 북측 매체 소속 기자 5명만이 참석했고, 경기 당일엔 선수들의 지원을 위해 방북한 대한축구협회 소속 관계자 2명이 기자증을 발급 받아 ‘1일 기자’ 역할을 했다.

15일 북한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2022년 카타르월드컵 아시아 예선 한국과 북한의 경기에서 한국 대표팀 선수들이 경기 시작 전 워밍업을 하고 있다. [사진 대한축구협회]

15일 북한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2022년 카타르월드컵 아시아 예선 한국과 북한의 경기에서 한국 대표팀 선수들이 경기 시작 전 워밍업을 하고 있다. [사진 대한축구협회]

그러나 북한이 전날까지 약속했던 경기장내 인터넷은 먹통이었다. 이 때문에 경기 진행상황을 이메일을 통해 서울에 알려주기로 했던 ‘계획’은 무산됐고, 아시아축구연맹의 홈페이지에서 경기 결과를 확인해야 했다. 북측이 선수단에 휴대폰이나 직통 전화 회선을 열어 주지 않으면서 깜깜이 경기가 되는게 아니냐는 우려가 현실로 된 것이다.

무엇보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는 순간까지도 관중석에 주민들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고요속의 경기가 된 건 보기 드문 장면으로 기록됐다. 정부 당국자는 “국내외 프로축구나 국가 대항전을 하면서 관중들 간에 충돌이 벌어져 징벌적 차원 또는 재경기를 하면서 무관중 경기가 열린 적은 있다”면서도 “남북한의 경기에서 관중 없이 치른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다양한 경로로 남측 응원단을 평양에 파견하려 했지만 북측이 호응하지 않아 불발됐다”며 “이후 북측의 일방적인 응원속에 경기를 하려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자 북측 당국이 아예 관중을 오지 못하게 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진행하는 2차 예선에서 북측이 홈팀임에도 불구하고 자국 응원단 없이 경기를 한 건 국제사회나 남측의 비난과 지적을 의식해, ‘실력’으로 겨뤄 보겠다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북한이 선수단 55명 이외의 인원에 대한 방북을 불허하면서 국내에선 10만 명대 0의 응원을 위한 꼼수를 부리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북한은 지난달 5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레바논과의 경기엔 다수의 관중들을 동원해 응원했다.

따라서 북한이 최소한의 선수단만 받아 들인 건 경색된 남북관계, 즉 정치적인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김일기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남북관계가 좋았다면 응원단이나 중계진의 평양 방문이 이뤄졌을 수도 있다”며 “북측이 남측 정부에 대해 뭔가 서운함을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해 2월 평창 겨울 올림픽을 계기로 경색된 남북관계가 풀렸던 만큼 평양 월드컵 예선이 유사한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이 사전에 원천 차단하는 차원에서 깜깜이 경기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이 인조잔디 구장인 김일성 경기장을 선택하고, 한국 선수단의 서울~평양 직항 노선을 허용치 않은 건 나름 홈 팀의 이점을 고려한 것일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전영선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교수는 ”김일성 경기장은 일제시대 해외에 있던 김일성 주석이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 귀환해 처음으로 연설한 곳에 세워진 경기장“이라며 “북한 내부적으로 상징성이 있는 만큼 선수들에겐 지지 말라는 정신력을 주입하고, 상대편에겐 위압감을 주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2017년 이곳에서 경기를 펼쳤던 여자 축구대표팀 지소연 선수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경기 시작전 북한 선수들이 ‘죽이고 나가자’고 소리쳐 기싸움에서 지면 경기를 해나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소개했다.
정용수ㆍ백민정 기자 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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