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배 해놓고···"日, 식민주의 맞서 인종평등" 외친 아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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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오른쪽)와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이 4일 열린 임시국회에 참석했다. [AP=연합뉴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오른쪽)와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이 4일 열린 임시국회에 참석했다. [AP=연합뉴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4일 임시국회 개막 연설에서 일본을 '식민주의에 맞선 인종평등 주창국'으로 표현해 논란이 일 전망이다. 사실상 일본이 아시아인들을 해방시키겠다며 전쟁의 빌미로 삼았던 일본 군부의 '대동아공영권' 주장을 옹호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어 주변국들의 반발을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대동아공영권' 옹호로 해석될수도 #임시국회 개막연설서 파리강화회의 언급 #일제 침략 전쟁은 쏙 뺀 '과거사 세탁' #평화헌법 바꾸려다 '역사 가리기' 논란 자초

앞서 지난달 17일 아베 정권의 2인자인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재무상은 아베 총리가 참석한 공식행사에서 과거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에 대해 ‘대동아전쟁’이란 표현을 사용해 구설수에 올랐다. ‘대동아전쟁’은 1941년 일본이 "유럽에 의한 아시아 식민지 침략을 해방시키고, 대동아공영권 건설과 아시아의 자립을 목표로 한다"는 전쟁 명분을 내걸며 각의(우리의 국무회의)에서 확정했던 명칭으로 일본에서 터부시돼 온 사실상의 금기어다.

문제의 주장은 연설 마지막 대목에서 나왔다.

아베 총리는 자신이 가장 강조하고 싶었던 개헌 관련 내용을 제일 뒷부분에 배치했다. 메시지 전달의 극적인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현상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를 응시하면서 교육, 일하는 방식,사회보장 등 사회 시스템 전반을 개혁해 나가겠다”며 “레이와(令和·일본의 연호)시대의 새로운 나라 만들기에 (여러분도)동참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어 "(새로운 나라 만들기의) 이정표가 헌법이고, 레이와시대 일본이 어떤 국가를 목표로 할지 그 이상을 논의하는 장이 바로 헌법심사회”라며 “국민에 대한 책임을 다하자”고 말했다. 개헌 논의에 야당이 참여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 일본의 평화헌법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강조하기 위해 아베 총리가 거론한 것이 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해 열린 1919년의 파리강화회의였다.

이 회의에 일본 대표로 참석했던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顕)의 발언과 주장을 '헌법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시대의 이상과 미래를 제시한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마키노는 아소 부총리의 외증조부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해 10월 14일 사이타마현의 육상자위대 아사카(朝霞) 훈련장에서 열린 자위대 사열식에 참석하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해 10월 14일 사이타마현의 육상자위대 아사카(朝霞) 훈련장에서 열린 자위대 사열식에 참석하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아베 총리는 "1000만명의 전사자를 낸 비참한 전쟁(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어떤 세상을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관해, 새로운 시대를 향한 이상과 미래를 응시하며 새로운 원칙으로서 일본은 ‘인종평등’을 내걸었다”고 했다.

아베 총리는 이어 "당시 전세계에 유럽의 식민지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일본의 제안은 각국의 강력한 반대를 받았지만, 그(마키노)는 결코 겁을 먹지 않고 의연하게 ‘곤란한 현실이라는 것은 인식하고 있지만, 극복하지 못할 것은 없다’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일본이 내건 큰 이상(인종평등)이 세기를 초월해 국제인권규약 등 국제사회의 기본 원칙이 됐다”고 했다.

아베 총리의 이같은 언급은 2차대전 당시 일본이 걸었던 제국주의 침략사를 언급하지 않은 채 그 이전만 내세운 '역사 가리기'이자 '역사 세탁'이라는 논란을 부를 전망이다. 일본 제국주의 시절 난징 학살, 관동대지진 학살 등 식민 지배 하에 있던 국민들은 조직적으로 학살됐다. 도쿄 도심에선 현재도 혐한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도쿄의 외교소식통은 "일본이 일으켰던 태평양전쟁 등 2차대전 관련 언급은 쏙 뺀 채 1차대전만을 언급했고, 한국과 대만을 식민지화했던 일본이 마치 ‘반식민지와 인종평등’의 길만을 걸어온 것처럼 주장했다"며 "특히 이를 평화헌법 개정을 위한 논리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논란을 자초했다"고 말했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서울=김상진 기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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