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 후 귀갓길에 교통사고 사망…法, "업무상 재해"

중앙일보

입력

회식 자료사진 [pixabay]

회식 자료사진 [pixabay]

동료들과 회식자리에서 술을 마신 뒤 집으로 가다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다면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서울행정법원 13부는(재판장 장낙원) “회식과 업무의 상당한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으므로 업무상 재해로 볼 수 있다”는 판결을 했다고 1일 밝혔다.

2017년 경기도 한 회사에 다니던 강모씨는 야근을 하다 동료 2명과 같이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갔다. 식사 뒤 집으로 가던 강씨는 출발하는 버스를 보지 못하고 치여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지고 말았다. 강씨 유족들은 이듬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유족급여를 청구했지만, 공단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단은 “회식을 회사가 계획하거나 참석을 강제한 것이 아니고, 강씨의 과음으로 사고가 난 점 등을 고려하면 업무상 재해로 보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이에 불복한 강씨 유족은 법원에 소송을 냈다.

회식 후 집에 가다 사망…어떤 점 따지나

회식에서 근로자가 주량을 초과해 음주한 것이 원인이 되어 부상이나 사망 등의 재해를 입었을 때는 이런 재해와 업무 사이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는지 따지게 된다. 예를 들어 ▶사업주가 과음 행위를 말리거나 제지했지만, 근로자가 자발적으로 과음한 것인지 ▶재해를 당한 근로자 외에 다른 근로자들은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회식 과정에서 통상적으로 따르는 위험 범위 내의 재해인지 등을 개별 사건마다 따지는 방식이다.

강씨가 회식에 참여하게 된 경위 등을 살핀 법원은 “강씨 사망과 업무 사이 상당한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회식 당일 강씨는 동료 2명과 청주로 출장을 다녀왔다. 회사로 복귀한 세 사람은 저녁 식사도 못한 채 오후 8시 30분까지 출장 관련 회의를 진행하다 식사 후 다시 회사로 들어와 일하기로 했다. 세 사람은 짐을 사무실에 그대로 두고 사무실 불도 켜둔 채 식사를 하러 나갔다. 식사자리가 1·2차로 길어지자 세 사람은 사무실을 정리하러 들어왔고, 이후 집으로 가는 길에 강씨가 사고를 당하게 됐다. 법원은 “식사 후 복귀해 일을 계속하려 한 계획으로 볼 때 회식과 업무 사이 밀접한 연관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회식 비용이 회사 법인카드로 결제된 점도 법원이 강씨 죽음을 업무상 재해로 판단한 하나의 근거가 됐다. 당시 1차 회식 비용은 강씨의 상사인 A씨가 법인카드로 결제하고 2차 회식 비용은 같이 간 다른 직원이 결제했다. 강씨의 회사는 점심ㆍ저녁 식사 비용을 모두 지원했는데 식사 후 법인카드로 결제하거나 개인카드로 결제한 뒤 회사에 청구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법원은 “이 회식은 사업주 관리 아래 이뤄진 회식으로 볼 수 있고, 강씨가 다른 두 직원의 만류에도 독자적으로 지나치게 많은 술을 마셨다고 볼만한 사정이 없다”며 강씨의 죽음을 업무상 재해로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회식 중 사고 분쟁…과거 유사 판례도

 앞서 대법원은 이와 비슷한 취지의 판결을 한 적 있다. 2014년 회사 직원들과 주점에 갔다가 건물 계단에서 실족사한 전모씨의 유족들이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라며 법원에 낸 소송 사례다. 1심과 2심은 "주점에서의 회식은 1차 회식이 끝나고 즉흥적으로 장소를 옮겨 실시한 회식이고, 이 회식에서 발생한 사고는 사업주의 지배나 관리를 받았다고 보기 어렵다"며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법원은 원심판결이 잘못됐다고 보고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회식 비용을 법인카드로 계산한 점 ▶전씨가 2차 회식에 스스로 빠지기가 어려워 보인 점 ▶전씨가 다른 동료의 제지에도 과음했다고 볼 수 없는 점 ▶다른 동료들도 전씨와 비슷한 정도로 음주한 점 등을 따졌다. 대법원은 사고 경위를 살펴볼 때 업무와 관련된 회식에서 당한 사고로 전씨가 사망했다고 보고 업무상 재해를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