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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 상고심 폭증 뒤엔, 혼자 6000건 쏟아낸 '무차별 소송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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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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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 분이요? 알죠”

19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종합민원실. “소송을 굉장히 많이 내는 분이 있다던데요”라는 질문에 접수 직원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사건 접수를 담당하는 직원들에 따르면 A씨는(직원들은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이름ㆍ나이 등 어떠한 개인정보도 알려주지 않았다) 지방법원 민원실에 자주 오는 편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한 번 올 때 서류를 손에 쥐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이 들고 온다고 한다.

 한 직원은 “두 달에 1~2번 정도 오는데 소송 서류를 이만큼씩 들고 온다”며 두 손을 위아래로 펼쳐 보였다. 다른 직원은 “이미 서로 얼굴을 아는 사이기 때문에 긴말이 필요하지 않다. 서류만 딱 접수하고 가신다”고 말했다.

대법원이 펴낸 2019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난해 대법원에 접수된 민사 상고심은 1만9156건이다. 2017년 접수 건수인 1만5364건으로 3792건이 늘었다. 전년 대비 증가율로 따지면 24%가 늘어났다. 전체 소송 건수는 지난해보다 약 2.3% 줄었고 민ㆍ형사 하급심 및 형사 상고심은 모두 전년보다 줄어들었지만 유독 민사 상고심만 크게 늘었다.

민사 상고심 접수 건수.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민사 상고심 접수 건수.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대법원이 민사 상고심이 많이 늘어난 이유를 알아보니 A씨가 지속해서 제기하는 소송 건수가 상고심 수치에 반영된 탓이 컸다. 전체 민사 상고심 건수 중 A씨가 낸 상고심 사건을 제외하면 2017년 상고심 접수 건수는 1만3173건, 2018년은 1만3025건이다. 오히려 소폭 감소한 수치다. 2018년 A씨가 제기한 민사 상고심만 집계하면 6131건이나 된다. 한 해 대법관 1명이 처리하는 사건이 약 4000건이라고 하니 A씨는 대법관 1명의 사건 처리 건수보다 더 많은 소송을 내는 셈이다.

국가ㆍ집주인ㆍ대법관도 소송 대상

대법원 관계자는 “A씨가 내는 소송 상대는 아주 다양하다”고 설명했다.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내기도 하고 보험회사, 운송사업조합, 세 들어사는 집주인, 택시 기사도 A씨의 피고가 됐다. 피고 중에서는 현직 대법관도 여럿 있다고 한다.

법조계에 따르면 A씨는 수년 전부터 법원에 무차별적 소송을 내고 있다. 복수의 법원 관계자에 따르면 40대 중반의 남성인 A씨는 2000년대 초반 당한 교통사고와 관련한 소송에서 패소했고 그 뒤로 재판을 맡은 판사나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만 소송 결과에 대해 따로 1인 시위나 법원 내 소동을 일으키는 일은 없다고 한다. 한 법원 관계자는 “A씨는조용히 왔다 조용히 돌아간다. 하지만 어떤 결정을 받으면 그 결정에 대해 또 다투기 때문에 한 사건을 끝내면 그보다 더 많은 사건이 접수되는 현상이 종종 생긴다”고 설명했다.

법원에 사건을 접수하면 인지대(법원 서비스 수수료로 소가를 기준으로 산출)와 송달료(소송 서류를 당사자 또는 상대방에게 보내기 위한 우편 비용)을내야 한다. 하지만 A씨는 이 비용을 거의 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A씨가 낸 대부분의 소송이 ‘소송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며 각하 처분을 받는다. 그러면 A씨는 또 이를 두고 재심을 내서 다툰다. A씨가 낸 소송이 하급심보다 상고심에 더 많은 이유다. 대법원은 재심 기각결정을 전산 항목 상 ‘파기자판’으로 분류하는데 2018년 상고심 파기자판 308건 중 166건은 A씨가 낸 재심에 대한 기각결정이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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