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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성봉의 이코노믹스

미국처럼 정치권 영향 벗어나야 전기요금 왜곡 막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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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가격통제가 초래한 한국전력 적자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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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력이 부실 공룡으로 전락하고 있다. 우량기업이 순식간에 수조 원대의 적자 수렁에 빠지면서다. 전기요금 인상은 시한폭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국민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한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 속사정을 살펴봤다.

원전 가동률 하락으로 원가 상승 #청와대가 전기요금 실질적 결정 #한전 이사회는 정부 거수기 전락 #전기요금 결정방식 바꿔야 한다

지난 6월 한전은 이사회를 두 차례 열었다. 6월 21일 이사회는 여름철 냉방요금 할인을 골자로 한 전기요금 개편안을 보류했다. 그러나 일주일 후(28일) 다시 열린 이사회는 정부의 냉방요금 할인을 반영한 ‘전기요금 공급약관 개정안’을 가결했다. 8년 전 사건이 재개되는 듯했다. 이명박 정부 후반인 2011년 8월 당시 김쌍수 한전 사장은 한전 주주들이 2조 8000억원 규모의 배임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자 사표를 던졌다. 임기만료 1주일 전이었다. 배임의 명분은 무엇이었을까. 그 배경에는 우리나라의 희한한 전기요금 인상 과정이 숨어 있다.

우선 전기요금의 표면적 조정절차(그림 1)를 보자. 한전이 먼저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에 요금조정을 신청하면 산업부는 기획재정부와 협의하고 전기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요금조정을 인가한다. 그러나 실제 전기요금 인상을 위해선 한전이 먼저 산업부를 접촉해야 한다. 대부분 반려된다. 그러나 사정이 심각하면 산업부는 기획재정부와 협의해 보겠다고 한다. 이 협의 내용은 청와대에 보고된다.

국제유가 급등해도 요금 못 올려

사실상 대통령의 재가가 있어야 전기요금 인상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 모든 절차를 거쳐 당시 4.9%로 전기요금 인상안이 확정됐다. 정부가 다 결정해 놓고 한전 이사회는 모양새만 취하는 셈이다. 그러나 4.9% 인상으로는 도저히 한전의 재무상태를 개선할 수 없었다. 최소한 10% 이상 전기요금 인상안을 제출했어야 했다. 한전 주주들이 배임을 거론한 이유다. 서류상으로 보면 책임은 한전에 있고 정부엔 없는 것처럼 보인다.

몇 달 후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2011년 9월 15일 수도권에 순환 정전이 발생했다. 2004년 이후 국제유가는 급등했지만, 정부는 전기요금을 억눌러왔다(그림 2). 명목 수준으로는 조금 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수준으로는 오히려 감소했다. 정치가 가장 큰 장애였다. 2004년 이래 대선·총선·지방자치단체장 선거까지 전국적 선거가 일곱 차례나 있어서 정부가 전기요금을 올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제유가 급등으로 모든 에너지 가격이 증가했는데 전기요금은 오르지 않았다. 그럴수록 전력 수요가 급증했다. 음식점마다 바닥 난방을 전기로 바꾸었고 학교와 사무실 건물에 시스템 에어컨이 유행했다. 2011년 여름은 아슬아슬하게 잘 지나갔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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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달은 9월 들어 나타났다. 여러 발전설비가 차례로 계획정비에 들어간 상황에서 늦더위가 몰려오고, 추석 연휴가 지나자 밀렸던 산업용 수요와 냉방수요가 급등하면서 전기가 모자라게 됐다. 그나마 전력거래소가 수도권 순환 정전을 지시해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전국 정전으로 이어질 뻔했다. 당시 지식경제부 장·차관부터 전력거래소 이사장까지 모두 물러났다.

2011년 9월 공석이던 한전 사장으로 김중겸 전 현대건설 사장이 임명됐다. 김 사장이 순환 정전 사태를 수습한 후 직면한 현실은 한전의 적자였다. 김 사장은 이 문제를 좌시하지 않았다. 2011년 11월 한전 이사회가 단독으로 10%대 전기요금 인상안을 가결해 버렸다. 버르장머리 없이(?) 일개 공기업 이사회가 사전 협의 없이 정부 방침에 반기를 들었다. 전기위원회는 이를 인가하지 않았다. 그러자 한전 이사회는 2012년 5월 13.1%의 전기요금 인상안을 가결했다. 전기위원회는 이를 다시 반려했다.

역대 사장들 못 버티고 줄사퇴

한전 이사회도 별수 없이 2012년 8월 4.9% 소폭 인상안을 가결해 전기위원회의 인가를 받았다. 정부와 한전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김중겸 사장은 2012년 11월 자진해서 사퇴했다. 전임자 김쌍수 사장 시절 국내 법원에 제기했던 소송에서 한전 주주들은 패소했다. 다만 지금도 주주들은 뉴욕법원에 제소할 수 있다. 한전 주식이 뉴욕증시에도 상장돼 있어서다. 뉴욕법원은 한전 주주들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

이번에도 한전과 정부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 지난 6월 초에는 한전이 전기요금 원가를 공개하겠다고 나섰다. 과거에는 정부가 원가공개를 요구했고 한전이 영업비밀이라며 숨겨왔다. 이젠 반대로 됐다. 오죽했으면 한전이 원가까지 공개하겠다고 한 것일까. 이번 이사회에서 누진제 개편안을 가결한 이유도 전기요금 개편안을 함께 의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내용을 한전과 논의한 적 없다고 선을 그었다.

어느 나라나 전기요금 같은 공익요금은 규제 대상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처럼 재량적이고 자의적 방식으로 전기요금을 규제하는 나라는 적어도 선진국 중에는 없다. 대표적으로 미국은 어떤가. 각 주마다 공익산업규제위원회(PUC)가 있다. 전력회사가 전기요금 인상을 요구하면 공익산업 규제위원들 앞에서 소비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조직인 소비자보호자문위원회(CAC)가 전력회사와 공방을 벌인다. PUC 위원들은 양측의 주장을 듣고 적절한 전기요금 인상률을 정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어떠한 정부 압력도 없다. 전기요금은 정치와는 독립적으로 투명한 과정을 통해 결정된다. 공익요금 결정을 정치로부터 차단하기 위해서다. PUC의 결정은 1심의 역할을 한다. 만약 이 결정에 불복하면 사법기관에 항소하면 된다.

한전 2년 만에 3조7000억원 적자

한국전력 이사회에 보고된 중장기 재무관리 계획안에 따르면 올해 한전의 영업손실은 1조5000억원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영업손실은 2조1933억원이었다. 영업손실이 계속 늘어나면 부채비율은 98.7%에서 111.8%로 급등하게 된다. 탈원전 정책 여파로 값싼 원전 발전 비중을 줄인 것도 원가 상승의 배경이 되고 있다.

이 여파로 한전의 전력 구매단가는 소비자에 대한 판매단가보다 훨씬 높다. ‘두부값보다 콩값이 더 비싸다’는 비유가 나오는 이유다. 전력공급 원가는 공개되지 않고 있으나 대략 구매단가의 120% 정도로 추정된다. 송배전 투자비와 각종 세부 원가가 수시로 변하기는 하지만 대략 원가의 20%가 송배전 비용이기 때문이다. 세계 평균이 40% 수준이라서 20%는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그림 3). 국토가 좁고 2500만 인구가 수도권에 집중된 공동주택에 살기 때문에 배전 비용이 낮을 수밖에 없다.미국은 집과 집 사이가 300m가 넘지만 우리는 1m도 안 된다. 발전 연료를 대부분 수입하면서도 우리나라 전기요금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이유다. 9·15 순환 정전이 있었던 2011년 한전의 추정원가가 판매단가를 크게 상회했고 2018년 이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한전은 정부에 연료비 연동제를 요구하고 있다. 연료비가 오른 만큼 전기요금이 자동으로 올라가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연료비 연동제도 지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전기요금도 적정 원가를 보장해야 한다’고 전기사업법 시행령과 물가안정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명시돼 있다. 지키지 않을 뿐이다. 전기요금 조정 주체를 선진국처럼 정부가 아닌 제3의 독립적 규제기관으로 명시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다.

그런데 쉬운 일이 아니다. 정부와 국회의 반대 때문이다. 지난 6월 확정된 3차 에너지기본계획에서 정부는 전문가 권고안에서 요금 결정의 독립성에 관한 부분을 삭제했다. 국회도 전기요금에 미치는 정치적 영향력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념 전 부총리가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나라는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정치가(statesman)는 보이지 않고 다음 선거를 생각하는 정치꾼(politician)만 보인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젠 선진국처럼 전기요금 결정을 정치의 영역에서 떼놓아야 한다.

◆조성봉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 오하이오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에너지경제연구원·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