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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에게 무시당한 청년백수, 그게 바로 저였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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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재난영화 ‘엑시트’의 한 장면. 이상근 감독은 "암벽 등반의 ‘자일 파트너’처럼 난관에서 목숨을 맡기며 서로 끌어주는 멋있는 젊은세대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재난영화 ‘엑시트’의 한 장면. 이상근 감독은 "암벽 등반의 ‘자일 파트너’처럼 난관에서 목숨을 맡기며 서로 끌어주는 멋있는 젊은세대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재난액션영화 ‘엑시트’가 개봉 14일째인 13일 누적 관객 600만 명을 돌파했다. 지난달 31일 개봉해 단 1주일 만에 손익분기점 350만을 넘기며 올여름 한국 대작 중 흥행 선두에 선 작품이다. 평소 무시당하던 청년 백수 용남(조정석)과 사회초년병 의주(윤아)가 유독가스로 뒤덮인 도심 고층빌딩을 암벽등반하듯 탈출하는 여정을 속도감 있게 그렸다. “생각 없이 보는 오락영화”라는 평가도 있지만, 한국 재난영화 특유의 신파 코드가 없어 신선하다는 호평이 더 많다.

600만 돌파 ‘엑시트’ 이상근 감독 #각본 쓴 지 7년 만에 늦깎이 데뷔 #“그저 얼떨떨…온갖 리뷰 다 찾아봐”

지난 7일 서울 암사동의 제작사 외유내강 사무실을 찾아가 ‘엑시트’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이상근(41) 감독을 만났다. 첫 장편 영화 데뷔작으로 흥행 돌풍을 일으킨 그는 “그저 얼떨떨하다”면서 “이러다 잠을 못 자겠다 싶을 만큼 온갖 리뷰를 다 찾아봤다”고 했다.

“가끔 뼈 때리는 지적도 있어요. 아동영화처럼 유치하다거나, 불친절하다거나. 엔딩크레디트와 함께 나오는 ‘쿠키 아닌 쿠키영상’도 극장 불이 빨리 켜져 못 본 관객들이 많더라고요.”

그가 말한 영상은 주인공들의 탈출 내막을 짤막하게 담은 것으로, 영화 본편이 끝난 후 잠깐 등장한다.

“영화 본편에 넣었더니 감정이 끊겨서 지금 편집본이 베스트였어요.”

이상근 감독. [연합뉴스]

이상근 감독. [연합뉴스]

순박한 웃음과 수줍게 말을 고르는 그의 모습이 극 중 용남과 닮아 보였다. “용남한테 내 모습이 많죠. 체력·운동실력 빼고 짠한 모습요. 저도 9년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 과정 졸업하고 준비했던 장편 아이템들이 잘 안됐거든요. 설거지·빨래 열심히 하며 부모님께 겨우 밥값 했죠. 6년 전 영화진흥위원회 공모에 당선돼 받은 기획개발비 지원금이 ‘인공호흡기’였어요.”

‘엑시트’도 처음 원안을 쓴 게 무려 7년 전이다. 드디어 개봉한 심정을 그는 이 장면에 빗댔다.

“용남이 가족을 구하기 위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산악기술을 발휘해) 옆 건물 옥상으로 처음 점프하는 장면요. 시나리오 쓰며 언젠가 내 필살기는 이거다, 인정받고 싶었거든요.”

처음 제목은 ‘결혼피로연’이었다. 남녀 주인공이 각각의 옛 애인 결혼식에서 만나 가스 테러에서 탈출하는 저예산 소동극이었다. 류승완 감독, 강혜정 대표 부부의 제작사 외유내강과 손잡고 영화 규모를 키우며 결혼식이 용남 어머니(고두심)의 칠순 잔치로 바뀌었다.

류승완 감독과 각별한 인연이라고.
“2006년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처음 만나 류 감독의 ‘다찌마와 리-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연출부로 일했다. 그때부터 류 감독을 ‘사수’로 모셨다. 데뷔작은 스스로 잘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하다하다 너무 절박해 결국 외유내강을 찾아갔다. 류 감독이 ‘재미있다. 대중영화로서 마이너한 부분만 만져보자’고 해서 하루 열두 시간씩 시나리오를 붙잡고 한 달 만에 정말 크게 바꿨다.”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1990~1994)을 보고 연출가의 꿈을 키웠다는 그다. 몇 번이고 본 인생영화는 불굴의 탈옥기를 그린 ‘쇼생크 탈출’(1995). 그 영향일까. “젊은이가 오랜 시간 참고 견디며 갈고닦은 재주로 세상에 한 방 먹이는 땀내 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쓰레기봉투를 뒤집어쓰고 숨 가쁘게 달리는 젊은이의 이미지였다”면서 “생존을 향한 절박한 몸짓이 숭고하게 느껴졌다. 여기서부터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갔다”고 설명했다.

암벽등반을 택한 이유는.
“자연에서 하는 스포츠를 도심에 접목하면 흥미로울 듯했다. 어딘가를 향해 올라가고 또 떨어지기도 하는 요즘 청춘의 삶과도 연결됐다. 스포츠클라이밍 국가대표 김자비 선수에게 자문을 구해 액션 동작을 만들어나갔다.”
재난과 코미디는 어우러지기 어려운데.
“희생자들의 참상과 함께 스펙터클을 전시하는 건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재난 상황은 초반부에 확실히 보여주고 이후론 용남과 의주의 질주에 집중했다. 영웅적이고 쿨하게 그릴 법한 장면에서도 후회하고 두려워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해 의외의 웃음을 겨냥했다. 그런 밸런스 조절이 중요했다.” 

극 중 용남 가족은 이 감독 자신의 집 판박이다. “친구들과 있던 조카가 용남을 모른 척하는 장면은 내가 조카 초등학교 때 겪은 실화”라며 그가 웃었다.

“TV 정보 프로그램 보며 메모하는 어머니, 드라마 좋아하는 아버지 모습은 저희 집 일상이죠. 용남이 가르마 때문에 어머니와 실랑이하는 것도 제 얘기고, 용남한테 취직·장가부터 묻는 친척들의 애정어린 잔소리를 저도 많이 들었죠. 마흔 넘어가니 이젠 묻기도 좀 미안해하시더라고요.”

엉뚱한 유머로 일상의 미세한 웃음을 건져내는 방식은 그동안 그가 연출한 단편 영화들에서도 통했다. 첫 단편 ‘꼽슬머리’는 소심한 곱슬머리 남자가 좋아하는 상대에게 고백하려다 머리를 빡빡 밀게 되는 이야기. ‘베이베를 원하세요?’는 꼬일 대로 꼬인 이어폰으로 기어코 음악을 듣는 청년을 그렸다.

“제가 남들 눈치 보느라 하루를 살아도 몇 배 피곤하게 사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런 일상을 나노 단위로 분석하면 의외로 많은 공감대가 양산되죠.”

영화 취향은 “잡식성”이란 그는 “전에 없던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갈망이 늘 있다”고 했다.

“차기작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주변 의견에 귀 기울여, 공동작업이자 감독의 예술로 잘 융화될 수 있도록 새롭게 도전하려 합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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