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다리를 한껏 벌려 내디딥니다. 누구여도 좋습니다. 걷느라 휘젓는 나머지 팔도, 얼굴도 화면 밖에 있어 안 보이니까요. 큰 붓 휘둘러 그린 저것이 꼭 걷는 사람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재독화가 노은님(73)의 신작 ‘큰 걸음’입니다.
스크린 속 곱슬머리 여자는 낙엽더미에서 나와 씩 웃습니다. 종이를 찢고, 모래를 뿌리고, 나무로 강아지 모양을 만들어 공원에 끌고 나가 다른 개들의 반응을 슬며시 관찰하기도 합니다. 붓과 물감만이 도구가 아닙니다. 비행선을 닮은 물고기를 그려 놓고는 “이렇게 보면 착륙하는 거고”라더니 큰 종이를 거꾸로 돌립니다. “이렇게 보면 이륙하는 거죠.” 노은님의 작품 세계를 담은 독일 다큐멘터리 ‘내 짐은 내 날개다’(1989)의 한 장면입니다.
이 그림도 거꾸로 돌려봅니다. 허공 향해 두 발 휘저으면 아무 데도 갈 수 없겠지만, 어쩌면 전혀 새로운 곳에 도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노은님은 1970년, 스물넷에 간호보조원으로 독일에 갔습니다. 그림을 따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잠 못 드는 날마다 그렸습니다. 그림들은 아파서 결근한 그녀를 문병 온 간호장의 눈에 띄었고, 병원 사무실에서 연 첫 전시가 인연이 돼 함부르크 미술대학에 다니게 됐습니다. “사는 게 꼭 벌 받는 것만 같았고, 남들보다 가진 게 없는 나 자신과 싸우는 날들이 많았다”며 당시를 돌아봅니다.
무엇이 되고자 한 것도, 무엇을 그리고자 한 것도 아닙니다. 이미지가 잡히든 안 잡히든, 어부처럼 매일매일 그려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옵니다. 젊은 날의 ‘벌’은 힘 뺀 붓질로, 그 시절의 ‘싸움’은 여백이 됐습니다. 그렇게 그린 ‘큰 걸음’에 노은님의 그림 인생이 겹쳐집니다. 어딜 그리 바삐 가느냐고, 그렇게 서둘지 않아도 가야 할 곳으론 가게 돼 있다고, 노화가가 나직하게 말을 건네는 것 같습니다.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차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