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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추가규제 안했다…재계는 “불확실성 여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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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일본 정부가 7일 공개한 수출규제 시행세칙에 기존 반도체 핵심 소재 3개 품목 외에 추가로 ‘개별허가’ 품목이 지정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통상 90일이 걸리는 ‘개별허가’를 받아야 하는 품목을 추가로 지정하지 않았다는 점은 다행이지만 일본이 한국에 대한 공세 수위를 조절했다고 보기에는 이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화이트국 한국 배제 시행령 공포 #수출 개별허가 추가 지정 없어 #일본 공세 수위조절 판단은 일러 #“추가 규제 언제든 가능해 답답” #개별허가 대상 지정된 세품목 #수십 건 허가 신청했지만 답 없어 #정부 오늘 일본 조치에 맞대응

일본은 이날 한국을 화이트국가(안보우호국)에서 제외하는 내용의 법령 개정안을 공포했다. 새 개정안은 오는 28일 시행될 예정으로, 이후부터는 일본산 제품의 대(對)한국 수출 절차가 기존보다 까다로워지고 불확실성이 커진다.

그러나 시행세칙인 ‘포괄허가취급요령’에선 한국에 대해 ‘개별허가’ 대상 품목을 추가하지 않았다. 기존 반도체 3개 소재를 제외한 품목은 일본 경제산업성의 1300개 자율준수프로그램(CP) 기업과 거래하는 한국 기업들은 종전과 똑같이 3년 단위 포괄허가 적용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 정부는 CP 인증을 받은 일본 기업 1300개 중 공개된 632곳을 전략물자관리원 홈페이지에 올려놨다. 일단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로 직접 타격을 받는 분야는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체에 국한될 것으로 보인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일본의 화이트국가 제외에도 CP 기업을 통한 ‘특별일반포괄허가’ 제도를 활용할 경우 국내 정보기술(IT) 하드웨어 업체들에 단기적으로 생산 차질이 생길 가능성은 미미할 것”이라면서 “중국·대만·싱가포르 등이 화이트국가가 아닌데도 생산 차질을 겪지 않은 것은 특별일반포괄허가 제도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에 대한 공세를 자제할 것이라고 판단하긴 이르다. 한국을 화이트국가에서 제외한 일본의 기조는 사실상 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반 품목의 경우라도 일본 정부가 무기 개발 등에 전용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면 언제든지 개별허가로 돌릴 수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핵심 관계자는 “한국이 새로 포함된 B그룹은 품목 규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일본이 시행세칙을 바꾸는 식으로 불시에 규제 품목을 추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익명을 요구한 5대 그룹의 한 임원은 “일본 정부가 규제 품목을 늘리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경영 불확실성은 여전하다”고 말했다.

반도체 기업 “최악 면했을 뿐 부품확보 대책 그대로 추진”

일본의 새로운 수출 상대국 분류 체계.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일본의 새로운 수출 상대국 분류 체계.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또 CP를 제대로 갖춰놓지 못한 일본 기업과 거래하는 한국 중소기업은 사실상 개별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악영향을 받을 우려도 여전하다. 지난달 4일 개별허가 대상으로 변경한 3개 품목에 대해 수십 건의 수출허가를 신청했지만 아직까지 일본 경제산업성의 허가를 받은 곳은 없는 실정이다.

문병기 한국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세부 품목에 대해 규제를 추가한다고 하면 한·일 간 강대강 국면이 강화할 수 있고, 이에 따른 자국 기업의 부담, 국제여론 악화 등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며 “앞으로 한국의 대책과 상황 등을 좀 더 지켜보고 이에 따라 대응계획을 짜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산업부 관계자도 “일본이 확전을 자제한 것으로 판단하긴 힘들다”면서 “세부 내용을 면밀히 분석해 봐야 하고, 이후 일본이 어떤 추가 수출규제 조치를 할지도 지켜봐야 한다”고 밝혔다.

7일 백색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한 내용이 담긴 일본의 수출무역관리령 관보. [AP=연합뉴스]

7일 백색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한 내용이 담긴 일본의 수출무역관리령 관보. [AP=연합뉴스]

일본 정부는 이날 법령 개정에서 그간 사용하던 수출 상대국 분류 체계를 기존 ‘화이트국가와 비(非)화이트국가’ 구분에서 그룹 A·B·C·D로 재분류했다. 그룹 A는 기존 화이트국가와 비슷한 개념으로 일본 기업이 수출할 때 일반포괄허가를 받으면 원칙적으로 3년간 개별허가를 받는 절차가 면제된다.

그룹 B는 4대 수출통제 체제 가입국이면서 일정 요건을 충족한 국가로, 그룹 A에서 제외된 나라다. 한국은 그룹 A에서 B로 바뀌었는데 이번 개정안에서 지위가 낮아진 국가는 한국밖에 없다. 그룹 B는 특별 포괄허가를 받을 수 있긴 하지만 그룹 A와 비교해 포괄허가 대상 품목이 적고 그 절차가 복잡하다. 그룹 D는 북한·이란·이라크 등 유엔의 무기금수국으로 지정된 국가들이며, 그룹 C는 A·B·D 어느 그룹에도 해당하지 않는 국가들이다.

재계에선 최악은 면했다는 반응이다. 현재로선 기존 반도체 업계의 피해가 더 커질 우려는 적어졌고, 반도체처럼 소재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품목도 당분간은 나오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나아진 것도 없다. 반도체 기업의 임원은 “일단 한숨을 돌린 것일 뿐 상황이 끝난 게 아니므로 협력 업체와 부품 재고를 확보하는 등의 기존 대책은 그대로 추진한다는 방침”이라고 말했다. 한 에너지 기업 관계자도 “통관 기간이 길어질 수 있는 품목을 정해 자체적으로 시뮬레이션하고 있다”며 “어떤 품목을 언제 추가로 제재할지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에 마음이 답답하다”고 하소연했다.

업종별로도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상대적으로 일본 의존도가 덜한 자동차와 철강 업계는 느긋하다. 반면에 전기차 배터리 업계는 긴장하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 리튬이온폴리머 전지를 생산하는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대표적이다. 두 기업은 알루미늄 포일 형태의 파우치(배터리를 감싸는 얇은 막)를 일본 기업에서 대부분 수입하고 있다. 삼성SDI의 경우 소형 배터리 제조에 사용하는 파우치를 일본에서 들여오고 있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오늘 발표에서 배터리 관련 소재가 포함되지 않아 다행”이라며 “파우치의 경우 대부분 일본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소재 수입이 막힐 경우 단기적으로 생산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도 속도를 낸다. 정부는 8일 열리는 일본 수출규제 대응 관계장관회의에서 일본을 우대국에서 제외하는 ‘전략물자수출입고시 개정안’을 안건으로 올릴 예정이다. 일본을 29개국이 속한 우대국가 지역인 ‘가’ 지역에서 ‘다’ 지역으로 옮긴다. 일본이 한국에 한 것처럼 포괄허가 혜택을 없애고 개별허가를 받도록 하는 게 주요 내용이다. 늦어도 다음달 중 시행할 방침이다.

손해용·강기헌·허정원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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