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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인사수석실에 이력서가 쌓이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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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 금융시장의 꽃인 서울 여의도 증권선물거래소(KRX) 건물 로비에선 요즘 '천막 농성'이 한창이다.

거래소 상임감사에 386세대 운동권 출신의 김영환(42) 공인회계사를 내정했다는 소문이 나돌자 노조가 반발하는 것이다. 이용국 노조 위원장은 14일 "거래소 팀장급 수준 이하의 경험과 실력을 가진 인사를 임명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하루 거래대금 4조원의 거대 조직에 걸맞지 않다는 논리였다.

여권 관계자는 "그는 부산 출신의 386그룹과 가까운 편이며 2002년 대선 캠프와 5.31 지방선거 때 강금실 후보 캠프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특별한 정치적 배경이 있는 게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김씨는 "감사 선임에 관심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을 뿐 (내정 사실을)통보받은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법정 방재기관인 화재보험협회도 낙하산 인사의 후유증에 휩싸여 있다. 제정무 전 금융감독원 부원장보가 지난달 하순 새 이사장에 임명됐으나 노조 측이 출근을 저지해 26일째 여의도호텔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노조 측은 "제 이사장은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했던 제정구 전 의원의 동생"이라며 "청와대 측의 전형적인 '봐주기 인사'"라고 주장했다. 협회 측은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다.

경주에 본사가 있는 경북관광개발공사의 김진태 사장은 지난달 "연임 사례가 없다"는 관광공사 노조의 반발에도 자리를 지켰다. 당시 "대구.경북(TK) 출신의 실세가 밀어줬다"는 뒷말이 무성했다.

참여정부의 '낙하산 인사'바람이 다시 거세지고 있다. 여권 인사들이 정부 산하기관.공기업의 빈 자리를 찾아 '인사 운동'을 펼치는 사례가 많아졌다. 그동안 소외됐던 중견 당직자들은 당 지도부를 통해 '희망 근무지'를 피력하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청와대 인사수석실에 이력서가 쌓이고 있다"고 밝혔다.

여권 내'인사 운동'의 배경에는 정권 말기에 자기 몫을 찾으려는 욕구가 깔려 있다. 기관장.감사의 거액 연봉(1억2000만~1억3000만원)과 판공비, 업무 차량, 그리고 자리에 따르는 경력 관리와 인맥 구축 등은 매력 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참여정부가 출범한 2003년을 전후해 자리를 꿰찼던 여권 인사 중 상당수가 임기 만료 시기를 맞았다. 그러다 보니 자기 사람을 심으려는 여권 실세끼리 부딪치는 상황까지 나온다는 후문이다. 자칫 권력 다툼이 벌어질 가능성이 엿보인다. 이런 현상은 김영삼.김대중 정권의 말기에도 있었다.

예컨대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 이사장 자리를 둘러싼 물밑 경쟁은 간단치 않다. 장준영 전 청와대 비서관 내정설이 도는 가운데 신부식 전 열린우리당 시흥시장 후보, 이선룡 전 금강유역환경청장이 거론된다. 공사의 한 관계자는 "이사장 선임이 오리무중이어서 조직 분위기가 뒤숭숭하다"고 전했다.

지난달 재출범한 노동부 산하 한국고용정보원의 원장에는 권재철 전 청와대 비서관이 전격 발탁됐다. 산하 기관에 일단 자리를 잡은 뒤 기관장으로 승진한 여권 인사도 있다. 손주석 환경관리공단 이사장과 박재호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이 그런 사례다. 이들은 모두 '40대 기관장'이다.

가스안전공사 사장, 원자력문화재단 이사장, 건강보험공단, 전기안전공사 등의 임원 자리도 하마평이 무성하다.

올 들어 정치권의 낙하산 인사가 감사직에 몰리는 현상도 주목된다. 기관장과 비슷한 대우를 받지만 책임과 업무량은 상대적으로 가볍기 때문이다. 기관장으로 가려면 인선 절차도 까다롭고 출근 저지 투쟁 등 내부 반발을 각오해야 한다.

산업자원부 산하 공기업인 수출보험공사의 경우 김송웅 사장은 내부 승진 케이스다. 감사에는 임좌순 전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이 7일 취임했다. 그는 열린우리당 후보로 보궐선거에 출마한 경력이 있다. 가스공사 감사 자리에는 배석범 전 민주노총 위원장 직대가 배려됐다. 가스안전공사 감사에는 당료 출신의 최동규 열린정책연구원 사무처장이 내정된 상태다. 중소기업진흥공단.강원랜드 등도 감사는 여권 출신 정치인이 차지했다. 한나라당에 따르면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지난해 말까지 공공기관에 임용된 정치인 출신은 134명. 그중 기관장은 54명, 상임감사는 60명이었다. 공기업 관계자들은 "특정 정파, 특정 코드의 인사들이 감사직을 맡아 공공 부문의 효율과 투명성을 제대로 감시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한다.

이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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