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칼럼

원고료 괴담 … 한여름 밤의 꿈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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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하나의 유령이 지금 한국 문단을 배회하고 있다'고 패러디해도 어색할 것이 없다. 이달 들어 글쟁이 사회에 짜하게 퍼진 '장당 원고료 3만원' 이야기다. 200자 원고지 한 장당 원고료가 3만원이면 단편소설 원고료는 80여 장짜리 한 편에 250만원. "시는 편당 30만원을 준다더라"는 소문이 덧칠되자 작가들은 한층 설레는 분위기다. 덕분에 문학판 술자리마다 원고료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장당 3만원'은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문학동네' 등 작가들이 선호하는 1급 문예지가 지급하는 원고료의 3배에 해당하는 돈이다.

소문은 신생 B출판사에서 비롯됐다. 이 출판사의 모기업은 학습지와 생활용품 사업으로 실적을 올린 유명 업체. 기업 이미지도 좋은 편이다. "기업 오너가 문학 진흥에 뜻을 품고 자회사(B출판사)를 전폭 지원하기로 했다. 용기를 얻은 B출판사 대표가 연말께 새로 문예지를 내기로 했고, 좋은 작가를 유치하기 위해 파격적인 고료를 책정했다"는 게 소문의 줄거리다.

정작 B출판사 대표는 황당(당황일지도 모른다)하다는 기색이다. 계획에도 없고 입 밖에 낸 적도 없는 풍문이 멋대로 떠돈다는 것이다. "문학잡지를 창간할지조차 아직 결정하지 못했고, 따라서 편집위원은 물론 잡지 제호조차 구상한 적이 없는데 무슨 3만원이냐"고 그는 반문했다. "새 잡지가 나온다는 풍문을 듣고 문단에서 집단적으로 내게 압력을 넣나 보다"는 농담도 했다.

당사자가 부인하든 말든 '원고료 괴담'은 일파만파다. 희망사항이 기정사실로 둔갑했을 수도 있다. 덩달아 기존 문학잡지들은 고민에 빠졌다. 문예지의 적자경영은 작품을 공급하는 작가들도 충분히 이해하는 처지. 잡지사들이 대부분 단행본 출판을 겸한다지만, 요새 공지영씨 빼고는 좀체 10만 부를 팔기 힘들다. 1급 문예지로 분류되는 A사의 한 간부는 "정말 걱정된다. 그러나 고료 3만원 시대가 온다면 우리도 출혈경쟁을 무릅쓰고 올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실토했다.

작가들은 환영하는 분위기다. 특히 전업작가들이 그렇다. 문단 데뷔 18년의 소설가 이순원씨는 "문예지들은 (고료를 올릴)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누군가 투자 차원에서 신호탄을 쏘아주는 건 환영한다고 말했다. 이씨나 구효서씨 같은 몇몇 작가는 문예지 원고료에 대한 기대를 접는 대신 기업체 사보에 글을 기고할 때는 '장당 3만원'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가난한 시인의 전형'으로 잘 알려진 함민복씨는 순수 문예지 아닌 기업체 사보나 일반 잡지에 발표하는 창작품이 더 많다. "원고료가 훨씬 높기 때문"이라고 그는 당당히 밝힌다. 글 외에 다른 수입원이 전혀 없으니까.

그렇다고 이 땅의 작가들이 높은 원고료에만 목을 매는 것은 아니다. 몇 년 전 창간했다가 얼마 못 가 제호를 내린 H문예지가 한 예다.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발간했던 이 잡지가 폐간한 데에는 "그 잡지에 내 글을 실을 수는 없다"는 문인들의 자존심도 한몫했다.

'장당 3만원'이 현실화될 경우 중견 소설가는 단편소설 한 편에 약 300만원을 받게 된다. 그 작품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문예지 게재 우수작품'으로 선정될 경우 400만원이 추가로 지급된다. 실력 있는 작가가 1년에 좋은 단편 4편을 발표한다면 총 2800만원. 부족하나마 어지간한 직장인의 연봉에 근접하게 된다. 물론 좋은 계간문예지를 내서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돼도 400부를 추가로 판매(문화예술위 구입분)하는 데 그치는 잡지사 입장에서는 3배로 뛰어오른 고료 부담을 벌충할 길이 여전히 막막하겠지만.

원고료 인상설은 '한여름밤의 꿈'으로 막을 내릴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소문의 배경이 된 문인들의 '꿈'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