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브레이크 걸린 박원순식 민주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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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복지행정팀 기자

이상재 복지행정팀 기자

“의회와 오해가 있었다. 다음엔 통과될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19일 ‘서울민주주의위원회’ 설치가 서울시의회에서 부결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에 앞서 17일 서울시의회 기획경제위원회는 박 시장이 서울민주주의위원회를 직속 기구로 설치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행정기구 설치 조례 개정안’을 부결시켰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소속 10명을 포함해 자유한국당·정의당 소속 각 1명 등 12명의 위원이 모두 반대했다.

서울민주주의위원회는 박 시장이 지난해부터 추진해온 ‘직접민주주의’ 모델이다. 공무원과 교수·법률가 등 전문가 위원 15명으로 구성돼 독자적인 사업을 구상해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한다. 박 시장은 “서울의 주요한 정책에 시민이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 플랫폼”이라고 말한다. 올해는 2000억원, 내년 6000억원, 2021년엔 1조원대로 독자 예산 규모를 늘리겠다는 것이다. 서울시  올해 예산은 31조원쯤 된다.

서울시는 다음 달이라도 ‘원 포인트 임시 시의회’를 열어 재논의를 추진하겠다는 방침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직접민주주의 관련 조례를 4월에 통과시켜 놓고 이번에 위원회 설치 조례를 수정 검토도 없이 부결시킨 것은 시의회가 자기 부정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의 몇몇 의원은 “박 시장의 태도가 갈수록 고자세다” “(박 시장과) 오해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시의회를 무시하고 있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민주주의의 본령은 대의민주주의이고, 시의회가 그 역할을 하는데, 박 시장이 직접 민주주의를 하겠다고 나선 게 의회를 무시하는 처사라는 뜻이다. 한 의원은 “서울민주주의 위원회에서 시민 이름으로 편성한 예산을 시 의회가 손댈 수 있겠느냐. 직접민주주의란 이름으로 박 시장 치적쌓기 사업을 내놓을 게 뻔하다”고 지적했다.

올 들어 박 시장은 ‘과속’을 하다 브레이크가 걸린 적이 여럿 있다. 서울대병원을 노원구 상계동 차량기지로 이전하겠다고 했다가 시의회에서 “구체적으로 진척된 것은 아니다”고 한발 물러났다. 이달 초에는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진행하는 팟캐스트에 나가 “북한에 100만 달러어치 식량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때도 서울시 남북교류협력위원회 심의 전이었다.

특히 이번엔 2011년 취임 후 내내 박 시장을 지지했던 ‘우군(민주당)’에게 외면당한 것이라 더욱 치명적이다. 오해가 있었든, 밥그릇을 침해하는 사안이었든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조급함보다는 교감, 박 시장에게 시의회 통과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 아닐까.

이상재 복지행정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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