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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 몫, 정치인의 몫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10여 년 전 포항의 한 천주교 수녀원 부랑인 수용소를 취재했던 기억을 되살려본다.
길거리에 버려진 부랑노인들을 모아 돌보는 이 수녀원의 수용소 곁 모양은 초라하기만 했다. 슬레이트지붕의 가건물로 기다랗게 연결된 마루는 시골 여인숙을 연상시켰다.
마침 계절이 초여름이라 모두 방문을 열어놓은 채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80을 훨씬 넘은 할머니 두 분과 50대로 보이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수녀가 함께 하고 있는 방.
수녀는 동맥경화로 한쪽다리가 자유롭지 못한 채 누워있는 할머니의 머리를 곱게 빗겨주고 난 후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이 뜨거운 수평적 이웃사랑의 정경을 눈여겨 바라보고만 있던 기자를 향해 마침내 할머니가 누운 채 말문을 열었다.
『친딸이라도 나를 이렇게 돌봐주지 않을거요. 나는 수녀님 덕으로 살고있어요.
할머니의 이 한마디는 방안을 들어서면서부터 내심 감탄했던 기자의 직관적 느낌을 확인시켜주었다.
시중들고 있는 수녀의 얼굴에서는 수직적인 하느님 사랑과 함께 인간구원을 향해 현실에 참여한「이웃 사랑」의 뜨거운 신앙과 헌신을 비신자로서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고자 전혀 사전 연락 없이 찾아가 취재 목적을 누누이 설명하고 가까스로「금남의 집」을 들어간 것이라 조금이라도 무슨 사전 준비 등의 꾸밈은 있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취재추억을 오늘에 다시 떠올려 본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판문점에서 임수경양과 함께 농성을 하고있는 문규현 신부의 현실참여 때문이다. 전대협 대표로 불법 입북해 김일성의 귀여운 인형이 돼, 온갖 철없는 소리를 외쳐대고 있는 임양을 보호하는 길이 평양으로 따라가 농성의 동료가 되는 길 밖에 없을까.
보기만 해도 근엄한 로먼 칼러의 신부복을 입은 사제 3명이 이 사건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게 두 손에 수갑이 채워진 채 구속됐다. 온 국민의 걱정과 비판의 대상이 된 임양을 보호한다고 동료신부를 북으로 보낸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31일 총회를 열어 단식농성·시국 기도회 등 당국에 대항하는 일전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또 사제단은 이 모든 일련의 결단들이 「통일열망」을 행동에 옮겼을 뿐이며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보호해야하는 사목의 길을 걷고 있을 뿐」이라고 밝혔다.
문규현 신부를 북한에 파견한 사제단의 결단은 사회변혁을 위한 교회의 현실 참여와 크리스천은 하느님의 절대 권능보다 인간의자의식·주체성을 일깨워 역사적 실천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데 앞장서야 한다는 정치신학을 배경논리로 하고 있다.
남미를 풍미한 해방신학 등의 현대 정치신학은 성직자의 예언자적 사명(현실참여)과 수평적인 이웃사랑의 정열, 가난한 자와 억압당하는 자를 향한 연민 등을 강조한 나머지 불의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혁명과 「불의한 폭력」을 타도키 위한 「정의로운 폭력」 등을 수용하는 경우마저 있다.
또 자본주의의 제도적 폭력을 세상 온갖 죄악의 근원으로 보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이데올로기로는 사유재산을 인정치 않는 사회주의를 지향한다.
물론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이 행동의 배경으로 삼고있는 신학이 어떠한 신학인지 단언할 증거는 없다. 또 정치신학도 여러 갈래이고, 그 사상적 배경과 현실 변혁의 방법론 등에서 각기 다르며 급진에서부터 중도·온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 때문에 사제단의 신학적 배경을 경솔하게 단정, 비판할 생각은 없다.
다만 문 신부를 북한으로 보낸 사제단의 신앙적 결단이 오늘의 우리 국민적 현실에 비추어 과연 바람직한 일이었는가, 「마땅치 않은 일」이었는가를 다시 한번 깊이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오늘의 한국천주교의 모든 대내외적 갈등과 대립은 결국 교회의 현실참여 문제로 또다시 귀착될 수밖에 없다.
흔히 성직자는 제사장적 사명과 예언자적 사명을 갖는다고 말한다. 정신구원 사업과 사회 구원 사업을 다같이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종교가 정치·사회참여를 하는데는 분명한 한계가 필요하다 물론 헌법이 형식적으로 선언한 정교분리원칙을 고수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인간의 삶은 정치와 종교 모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현실참여는 어디까지나 「비판적 선언」에 머물러야한다는 준거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구체적 실천방법으로는 강론·설교 등을 통한 사회불의나 모순의 비판과 신자를 대상으로 한 교회 내 집회 등을 제시할 수 있겠다.
교회의 현실참여는 어떠한 경우에도 교회 밖을 나와 데모를 하거나 농성으로 나아가서는 곤란하다고 본다.
교회 밖의 정치적·사회적 행동은 정치가·사회운동가의 몫이지 사제의 차지는 아니다.
이은윤 <특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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