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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힘들어도 그렇지"…교량 황동 명판 무더기 도난

중앙일보

입력

9일 대구 달성군 가창면 한 다리에 붙어 있던 황동 명판을 누군가 뜯어간 모습. 대구=김정석기자

9일 대구 달성군 가창면 한 다리에 붙어 있던 황동 명판을 누군가 뜯어간 모습. 대구=김정석기자

“아무리 힘들다 캐도 우째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심니더.”

최근 대구, 경북서 다리 명판 20여개 사라져 #1kg당 4000원…고철 10배 가격에 절도범 표적 #경기침체에 막 훔치는 '생계형절도' 기승

9일 오전 대구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 한 고추밭에서 일하고 있던 김정복(72)씨의 말이다. 고추밭에서 10여m 떨어진 곳에 있는 송정교에 설치된 황동(黃銅) 명판이 감쪽같이 사라진 모습을 보고 그는 “경제가 어렵긴 어려운 모양”이라며 혀를 찼다.

최근 송정교 다리 양쪽에 2개씩 설치된 황동 명판과 설명판 4개 중 3개가 사라졌다. 원래 자리는 누군가 명판을 억지로 떼어낸 듯 접합부가 부서진 채로 움푹 패 있었다.

이곳으로부터 1㎞가량 떨어진 대밭들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다리 양쪽에 설치된 황동 명판·설명판 4개 중 2개가 뜯겨나간 모습이었다. 특히 명판보다 크기가 큰 설명판을 노린 듯했다. 설명판에는 교량 위치, 차도 폭, 공사기간, 시행청, 시공자 등을 기록해 크기가 커 개당 무게가 10~30㎏에 달한다.

이렇게 최근 사라진 황동 명판과 설명판이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과 인근 경북 청도군 지역에서만 약 20개로 추정된다.

9일 대구 달성군 가창면 한 다리에 붙어 있던 황동 명판을 누군가 뜯어간 모습. 대구=김정석기자

9일 대구 달성군 가창면 한 다리에 붙어 있던 황동 명판을 누군가 뜯어간 모습. 대구=김정석기자

황동 명판과 설명판은 재질이 비싸다. 구리에 아연을 첨가해 만든 황동은 고물상에서 비싼 값에 팔린다. 대구 북구의 고물상 주인은 “황동은 1㎏당 시세가 4000원 안팎으로 일반 고철보다 10배 이상 비싸 절도범의 표적이 된다”고 설명했다.

대구 달성군 가창면에서 닭백숙 음식점을 운영하는 김모(44·여)씨는 “이맘때면 주말을 맞아 가족 단위 손님이 많았는데 최근엔 크게 줄었다. 경기 침체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니 다리 명판까지 떼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구 달성군과 경북 청도군은 교량 명판 도난이 잇따라 일어난 만큼 피해 현황 파악을 한 뒤 경찰에 수사 의뢰할 방침이다. 도난당한 명판은 황동 대신 돌로 제작하는 방법도 고려 중이다.

한편 이 같은 ‘생계형 범죄’는 최근 경기침체와 함께 늘어나고 있다. 생계형 범죄는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해 건축자재, 조경수, 교통시설, 생필품 등 돈 되는 것은 닥치는 대로 훔치는 범죄를 말한다.

대구 달서구에선 지난 5월 아파트단지를 돌며 통신·피뢰침 접지선 7억 원어치를 훔친 남성이 구속됐다. 대구 달서경찰서에 따르면 A씨(49)는 2017년 11월부터 지난달까지 대구·경북 62개 아파트단지에서 접지선 6만9000m를 훔친 혐의를 받고 있다. 접지선은 과전류를 땅으로 흘려보내 화재나 감전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시설로, 피복 안에 구리선이 있어 고물상에서 고가에 팔린다.

대구 한 아파트 배전반 속 전기설비 가운데 초록색 접지선만 절단된 채 사라진 모습. [사진 대구경찰청]

대구 한 아파트 배전반 속 전기설비 가운데 초록색 접지선만 절단된 채 사라진 모습. [사진 대구경찰청]

소화전 관창(管槍·소화전 끝부분에 달린 분출 장치)도 절도의 대상이다. 지난해 5월 부산에서는 2017년부터 지난해 4월까지 부산·김해경전철과 부산도시철도 21개 역을 돌며 27차례에 걸쳐 소방호스 관창 88만 원어치를 훔친 40대 남성이 붙잡혔다. 소방호스 관창이 황동 재질이어서 1㎏당 3000~4000원씩에 고물상에 내다 팔 수 있었다.

대구=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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