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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 앞선 횔첼의 ‘추상’…색을 표준화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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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9호 18면

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 <12>

‘유한한 존재’가 갖는 공포와 불안은 무엇보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시간의 불확실성에서 기인한다. 누구나 죽는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두려운 거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과 언제든 느닷없이 헤어질 수 있다는 이 ‘시간의 불확실성’과 관련해 실존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1899~1976) 는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in die Welt geworfenes Wesen)’라는 표현을 썼다. 누군가에 의해 이 세상으로 느닷없이 던져진 존재이므로 언제든 또다시 죽음으로 느닷없이 던져질 수 있기 때문에 두렵다는 것이다.

변화에 대한 현대인의 불안 #자연 거스르는 추상회화 만들어내 #아돌프 횔첼이 연구한 색채이론 #제자 이텐이 바우하우스서 ‘개화’

도대체 어디를 향하는지 우리의 인식체계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무한한 시간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인류는 아주 기막힌 해법을 찾아냈다. ‘시계’와 ‘달력’이다. 매일 그리고 매달 시간을 ‘반복’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하는 것으로 했다. 매년을 새로 시작한다고 ‘생각하기로 하니’ 더 이상 불안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한 해가 또다시 시작되는 날을 우리는 그렇게들 기뻐하는 거다. 지난해를 아무리 형편없이 보냈더라도 새로 시작하는 한 해는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다.

자연과 대립하고 화해하며 ‘예술 욕구’ 생겨

① 아돌프 횔첼의 그림 ‘붉은색의 구성’(부분). 1905년 그려진 이 그림은 칸딘스키가 1910년 그린 ‘최초의 추상화’를 앞서는 추상화로여겨진다. ② 독일의 예술교육자 아돌프 횔첼. ③ 횔첼의 제자 요하네스 이텐이 만든 색채대비표. 스승횔첼의 ‘색의 표준화’ 연구를 발전시켰다. ④ 바우하우스에서 예술 교육을 맡았던 요하네스 이텐.

① 아돌프 횔첼의 그림 ‘붉은색의 구성’(부분). 1905년 그려진 이 그림은 칸딘스키가 1910년 그린 ‘최초의 추상화’를 앞서는 추상화로여겨진다. ② 독일의 예술교육자 아돌프 횔첼. ③ 횔첼의 제자 요하네스 이텐이 만든 색채대비표. 스승횔첼의 ‘색의 표준화’ 연구를 발전시켰다. ④ 바우하우스에서 예술 교육을 맡았던 요하네스 이텐.

또 다른 근원적 두려움이 있다. ‘무한한 공간에 대한 공포’다. 인류에게 도무지 그 크기를 감 잡을 수 없는 무한한 공간은 시간만큼이나 두려운 것이었다. 무한한 공간의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초라한 존재였다.

공간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인간이 갖게 된 것은 ‘원근법’을 발명하면서부터다. 원근법을 통해 3차원 공간을 2차원으로 축소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 인간은 원근법의 소실점으로부터 ‘객관성’이라는 신화를, 그리고 소실점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공간좌표로부터 ‘합리성’이라는 신념을 갖게 된다. 서양이 동양을 물질적으로 앞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이 원근법의 발명과 이에 기초한 ‘객관성’과 ‘합리성’으로 무장한 과학적 사고 때문이다.

‘회화’란 인간이 ‘무한한 공간’과 상호작용하는 ‘도구’라고 설명한 심리학자가 있다. 20세기 초반 독일의 미술사학자이자 심리학자인 빌헬름 보링거(Wilhelm Worringer·1881~1965)다. 인간과 자연(공간)과의 대립과 화해과정에서 ‘예술욕구(Kunstwollen)’라는 근원적 욕구가 생겨난다고 보링거는 주장한다. 1908년 처음 출간된 자신의 책 『추상과 감정이입』에서 그는 이 ‘예술욕구’가 ‘감정이입충동(Einfühlungsdrang)’과 ‘추상충동(Abstraktionsdrang)’의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고 설명한다. ‘감정이입’은 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미적 체험이다. 인간의 예술욕구가 감정이입으로 표현될 때,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현하고 모방하는 ‘자연주의 미술양식’이 나타난다. 자연과 인간이 서로 화합할 때의 심리적 경험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게 조화로운 관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지의 자연, 무한한 공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경험하기도 한다. 바로 이 같은 불안한 내적 체험으로부터 ‘추상충동’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추상회화는 바로 이 같은 추상충동의 결과물이다. 근대화라는 급속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현대인들의 불안이 근대 추상회화의 사회심리학적 바탕이 된다는 이야기다. 보링거는 원시시대의 기하학적 문양들이 바로 이 같은 추상충동이 발현된 결과라고 주장한다. 인류 예술충동의 발현과정을 살펴보면 ‘감정이입’보다는 ‘추상’이 훨씬 더 오래되었다는 이야기다. 두려움이 먼저였다! 오늘날 우리가 즐겨하는 자연을 모방하고 재현한 ‘아름다운 예술’은 원시시대부터 존재해왔던 ‘추상’에 비하면 매우 최근의 발명품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룰 때, 즉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때 자연을 재현하는 ‘모방예술’이 생겨나고, 자연과 불화할 때 ‘추상예술’이 생겨난다. 이때의 ‘추상예술’이란 인간의 자의적인 기하학적 형태와 상징들로 자연과 공간을 새롭게 구성하는 방식을 뜻한다. 자연에 인지체계를 맞춰가는 ‘감정이입’과 자연을 인간의 인지체계 안으로 끌어들여 재구성하는 ‘추상’이라는 두 가지 방식의 상호작용방식에 대한 보링거의 심리학 이론은 청기사파, 다리파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최초의 추상화가를 자처하는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가 자신의 추상회화의 이론적 근거를 저술한 책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는 보링거의 책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었다. 한마디로 보링거의 『추상과 감정이입』이 출판된 후로 ‘추상회화’가 개념적으로 가능해진 셈이다.

그러나 보링거와 칸딘스키로 이어지는 추상의 계보와는 다른 추상의 계보가 있다. 아돌프 횔첼(Adolf Hölzel·1853~1934)에서 요하네스 이텐으로 이어지는 추상회화의 전통이다.

예술교육전문가로 요하네스 이텐을 초빙한 것은 그로피우스에게 ‘신의 한 수’였다. 기존의 아카데미식 미술교육의 대안으로 이텐의 예술교육만큼 훌륭한 대안은 없었다.

스위스 출신인 이텐은 베른의 시골학교 선생이었다. 그러나 뒤늦게 미술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이때 독일 슈투트가르트 예술아카데미에서 평생의 스승 아돌프 횔첼을 만나게 된다. 횔첼을 만나기 위해 이텐이 제네바에서 슈투트가르트까지 500km에 가까운 거리를 걸어서 갔다는 이야기는 아주 유명하다.

사실 횔첼에 대한 문헌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당시 독일의 대표적인 예술교육가였다. 그의 제자들은 ‘횔첼사단(Hölzel-Kreis)’이라 불렸다. 후에 바우하우스 선생이 되는 요하네스 이텐과 오스카 슐레머(Oskar Schlemmer·1888~1943)가 그의 제자였다.

오스카 슐레머는 바우하우스식 예술교육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이텐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었다. 표현주의 화가로 활약했던 에밀 놀데(Emil Nolde·1867~1956)와 그로피우스가 알마와 이혼하고 바우하우스를 설립하며 힘들어할 때 연인으로 또 재정적 후원자로 큰 힘이 되었던 여성화가 릴리 힐데브란트(Lily Hildebrandt·1887~1974)도 ‘횔첼사단’에 속했다(아, 그녀도 재력가를 남편으로 둔 유부녀였다). 횔첼은 알마 말러의 새아버지 칼 몰(Carl Moll), 그리고 클림트의 친구이기도 했다(당시 유럽 예술가 사회는 참 좁았다. 이렇게 한 다리 건너면 죄다 연결된다).

예술,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되다

횔첼은 뮌헨 인근의 다하우(Dachau)라는 작은 도시를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빈분리파(Wiener Secession)’의 핵심멤버였고 ‘뮌헨분리파’를 주도하여 창립하기도 했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횔첼은 ‘추상(Abstraktion)’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그가 1905년 그린 ‘붉은색의 구성(Komposition in Rot)’은 1910년부터 시작되는 칸딘스키의 추상회화를 시대적으로 앞서는 것으로 추상의 선구적 작품으로 여겨진다.

종교화에 대해 알레르기 같은 거부감을 가졌던 횔첼은 색채이론을 집중적으로 파고 들었다. 색채를 매개로 한 그의 추상회화는 당시로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무엇보다 횔첼은 색을 규격화, 표준화하려 애썼다. 그는 ‘색의 표준화’를 예술교육의 핵심으로 여겼다. 그는 ‘대비(Konstrast)’를 통해 색채를 구분했다. 이텐은 스승 횔첼이 구분한 6가지 ‘색채대비(Farbkontraste)’에 한 가지를 덧붙여 『색채의 예술』이라는 책을 썼다. 수십년이 지난 1961년의 일이다. 학창시절 미술시간에 배운 ‘색상대비’ ‘명암대비’ ‘한난대비’ ‘보색대비’ ‘동시대비’ ‘채도대비’ ‘면적대비’가 바로 그 내용이다.

이텐이 바우하우스에서 시도한 예술교육에서 이 같은 ‘색의 표준화’는 치명적이고 결정적이었다. ‘편집을 통한 창조’가 가능하려면 ‘편집의 단위(unit of editing)’가 분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로피우스가 ‘가르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했던 ‘예술’은 이텐을 통해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1914년 독일공작연맹에서 시작된 ‘표준화논쟁’은 1919년 설립된 바우하우스에서 이렇게 ‘표준화’ 진영의 승리로 끝이 난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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