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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인휘의 한반도평화워치

정부의 한반도평화정책은 비핵화 상황과 보조 맞춰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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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대북정책과 내치·외치 줄타기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북풍(北風)·총풍(銃風)·병풍(兵風)…. 이런 단어들에 고개를 젓던 시절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놓인 집권 세력이 북한 문제의 방향타를 의도적으로 조정하거나, 혹은 특정 정치 집단이 국내 정치적 목적으로 북한 문제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이슈화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비핵화 진척 없는 상황에서 #정부만 평화 정착 나섰다간 #국민 눈높이 맞추지 못하고 #비핵평화 현실적 균형 상실

우리 사회가 성숙해지면서 북한 문제를 국내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하지 말자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동시에 정치 지도자들의 의식에도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더구나 현 정부 등장 이후 평화로운 방식에 의한 북한 문제 해결이라는 국내·외 공감대가 이뤄졌으니, 북풍이나 총풍은 이제 상상키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혹시라도 의도하지 않은, 일종의 선(善)한 의도에 의한 북풍이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겨나고 있다. 사실 대북 정책이 내치인지 아니면 외치인지를 구분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북한 문제는 모든 외교·안보 역량을 결집시켜야 하는 대외 정책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의견이 충분히 반영된 국민적 공감대를 전제로 해야 하는 국내 정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는 5000만 명의 북한 전문가와 5000만 명의 입시 전문가가 있다는 세간의 말처럼 한반도 문제는 언제나 우리 모두의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북한 문제는 지난(至難)한 외교·안보 사안이면서 동시에 고도로 험난한 국내 정치적 아젠다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평풍(平風)이라는 표현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북한이 느끼는 근본적인 생존 두려움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한반도 평화를 달성하기 어렵다는 문재인 정부의 판단은 원칙적으로 옳은 방향이다. 그래서 비핵화 문제와 평화체제 문제를 동시에 병행 추진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전략적 스탠스와 관련한 많은 노력이 북한 문제를 협상 모드로 급선회하는 데 일조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북한의 비핵화 상황이 좀처럼 진척을 내지 못한다면 평화 정착 로드맵 역시 거기에 따라 보조를 맞춰야만 한다. 그래야 북한도 과거와 같은 기만과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고, 비핵평화 병행 추진의 현실적 눈높이를 체감한 우리 국민의 지지도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북한의 진정성과 행동에 불신의 기류가 남아 있는데, 우리만 평화 정착의 당위성을 오버페이스로 강조하고, 이런 오버페이스가 국내 정치적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면, 이를 ‘평풍’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북한에 평화체제에 대한 일관된 메시지를 발신하는 노력과 비핵평화 사이의 현실적 균형을 맞추는 일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한반도 문제가 외교이면서도 국내 정치라는 현실은 베트남 정상회담에서 맞섰던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도 마찬가지였다.

트럼프 대통령도 개인 변호사였던 마이클 코언이 하원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미국 내 정치 상황 때문에 하노이 회담에서 더 엄격하고 투명한 대북 정책으로 선회했다. 66시간의 열차 외교가 아무런 성과 없이 막을 내린 북한의 경우에도 북한 내 김여정·김영철·김혁철 등의 거취에 관심을 쏠리게 만들었다.

외교와 국내 정치가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실은 세계 도처에서 자연스럽게 발견되고 있다. 오죽하면 일군의 국제정치학자들은 이러한 부분만을 부각해 대외 관계와 국내 여론을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양면외교(Double Diplomacy)’라는 연구 주제를 발전시켰을까.

우리 정부는 이럴 때일수록 더욱 신중해야 한다. 북풍과 총풍의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국민들이 ‘평풍’을 떠올리는 순간 정부가 북한을 상대로, 또 미국과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반도 평화를 이뤄낼 협상의 여지는 더 좁아지게 마련이다. 이 부분이 바로 ‘양면외교’가 강조하는 핵심 내용이다.

대통령이 최근 5·18 기념식에서 보였던 민주주의에 대한 진심과 의지는 대북 정책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는 국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 정착을 이룩하기 위한 문재인 정부의 노력을 외면할 생각은 추호도 없기 때문이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실패 이후 대체로 북한의 대외 행동에 두 가지 방향성이 예상됐다. 하나는 중국·러시아를 상대로 한 외교 자율성 확보에 주력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다른 하나는 미국이 인내심을 거두지 않을 범위 내에서 저강도 도발을 계속할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하노이 회담 이후 지난 두 달 동안 보여 온 북한의 행동은 이러한 예측과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최고 지도자들이 내보인 패(霸)가 충돌했기 때문에 북·미 사이의 냉각기는 조금 길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운명의 시간은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이다. 6월 말 오사카 G20 회담과 미국 대선 1년 전이면서 한국 총선 4개월 이전인 연말 사이에 한반도를 둘러싼 운명의 시계추가 또 한 번 요동칠 것이다. 주요국 간에 치열한 외교전이 전개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시진핑 주석의 평양 방문이 이뤄질 수 있고,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이 성사될 수도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 진정한 북한의 비핵화 의지와 노력을 보고 싶다. 결과적으로 이와 연동된 한반도 평화 정착의 순간들도 목도하고 싶다. 내치이면서 외치인 북한 문제를 다루는 우리의 생각과 능력이 이제는 한층 더 세련되고 전문화되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외교적 타협은 대외 협상과 국내 공감대의 균형에 달렸다

로버트 퍼트넘

로버트 퍼트넘

로버트 퍼트넘(사진)은 하버드 대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국제정치학자다.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 사회적 협치(social governance) 등에 대한 연구 업적이 많아 비교정치학 연구자 범주에 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비교정치학과 국제정치학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걸 보면 퍼트넘은 일찍이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을 내치(비교정치)와 외치(국제정치)의 연계에 두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양면외교 혹은 양면게임(Two Level Game) 이론의 핵심 주장은 대외 협상과 국내 공감대 사이에 절묘한 균형이 이뤄져야 외교적 타협이 성사된다는 것이다. 양면게임 이론을 북·미 협상에 적용하면 민주주의가 성숙한 미국과, 완벽한 일인 독재 국가인 북한이 협상하면 어느 국가가 더 유리할지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 과정에서 커다란 자율성을 보장받지만, 협상 내용이 국민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무한한 비판에 직면한다. 북한도 비슷한 어려움에 부닥치게 된다. 절대적 독재 리더십을 확보한 김정은 위원장은 협상 과정에서 커다란 자율성을 누릴 수 있지만, 본인의 결정과 역량이 국민에 대한 무한 책임을 가진다는 생각은 끝없는 부담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베트남 하노이 회담의 협상 결렬에 대해 전문가들은 비핵화의 근본 개념에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지만, 인간적 부담과 입장 차이가 더 크게 작용했을 수 있다.

우리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촛불 민주주의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는 우리 사회의 성숙한 민주주의만큼이나 대북 정책의 자율성을 가지겠지만, 그만큼의 부담과 국내 압박에 직면해 있다. 더구나 한국인은 북한 문제가 국내 정치와 왜곡돼 결합된 부조리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북한 문제와 국내 정치 사이에 끼인 문재인 대통령은 답답해하거나 한계에 갇히기보다, 북한과 우리 사회 사이에서 소통의 공간을 확보하고, 합당한 수준에서 서로 만족할 수 있는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대북 정책에는 미다스의 손이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 국민 모르게 조용하고 신속하게 처리할 일이 있을 것이고, 때로 국민 탓으로 돌리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외치이자 내치인 북한 문제의 속성을 의도적으로 조작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가 사상누각이 돼서는 안 된다. 평화의 모래성을 피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문재인 정부가 최초에 제시한 원칙인 ‘비핵화-평화정착’의 선순환과 병행 추진을 밀고 나가면 된다. 베트남 이후 다시 찾아온 시련의 시간을 지혜롭게 헤쳐가길 희망한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정치학 교수·리셋 코리아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