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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주세(酒稅)법 개정 두고 나는 업계, 기는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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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서 소비자가 수입 맥주를 고르고 있다. [뉴스1]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서 소비자가 수입 맥주를 고르고 있다. [뉴스1]

정부가 술에 매기는 세금, ‘주세(酒稅)’법을 개정한다고 나섰을 때 기대가 컸다. 혹시나 좀 더 맛있는 국산 수제 맥주를 마실 수 있지 않을까, 혹은 국산 맥주도 ‘4캔에 1만원’ 패키지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다. ‘50년 만의’ 개정이라고 해서 더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로 가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7일 주세 부과 방식을 ‘종가세(제조 원가에 과세)’에서 ‘종량세(용량 또는 알코올 도수에 과세)’로 바꾸는 내용의 주세법 개정과 관련 “주류 업계 간 이견이 있어 시간이 필요하다”며 돌연 ‘후퇴’를 선언했다. 주세법 개정을 취소할 가능성에 대해선 “말하기 어렵지만 최대한 개편하려고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홍남기 경제부총리도 “(주세법 변경을) 이번에 꼭 해야 하는지 판단하고 있다”며 한발 물러섰다.

돌이켜 보면 주세법 개정과 관련한 정부 행보는 '갈팡질팡'으로 요약된다. 맥주 종량세 도입 여론이 커진 지난해 7월엔 김동연 전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전 주종(酒種)의 조세 형평성 등을 고려해 개정을 백지화ㆍ재검토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11월엔 “내년 3월 개편안을 내겠다”고 약속했다. 올 들어선 “5월 초 발표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결국 7일 다시 “잠정 연기”로 돌아섰다. 한 맥주 업체 임원은 “1년 새 세 번이나 ‘결정 장애’를 번복한 정부에 주세법을 개편할 의지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수입 맥주와 싸우느라 고사 직전인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냐”고 말했다.

주세법 개정은 ‘역차별’ 받는 국산 맥주의 돌파구로 기대를 모았다. 술은 최고세율이 72%에 달하는 ‘세금 싸움’인데 수입 맥주는 국산 맥주와 달리 판매관리비ㆍ이윤에 세금을 내지 않아 국산 맥주와 세금 차가 최대 20~30%에 달한다. ‘4캔 1만원’ 마케팅이 가능한 이유다. 국민도 응원했다. 지난해 5월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 오른 “대다수 나라가 시대 발전에 따라 점점 좋은 술을 마시는데 우리나라만 조선 시대만 못한 저급 술을 마신다. 50년 전 낡은 종가세 제도를 유지하기 때문”이란 내용의 글에는 1900여명이 동참했다.

다만 주세법 개정은 여러 술 종류 간 이해관계가 다른 ‘고차방정식’이라 세심하게 다뤄야 한다. 종량제를 적용하면 국산 맥주는 득을 보지만 ‘서민 술’인 소주는 알코올 도수가 높아 세금이 더 붙을 수 있다. 복분자주 같은 전통술도 와인에 비해 알코올 도수가 높을 경우 가격이 오를 가능성이 있다. 반면 고급 술인 위스키의 경우 종가세 방식 때보다 세금을 적게 내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런데 기재부는 “가격 인상 없는 주세 개편을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고통 없이 거위 털을 뽑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안창남 강남대 세무학과 교수는 “모두를 만족하게 하는 ‘묘안’을 찾겠다는 얘기지만 이상적인 원칙 때문에 개편이 더 꼬였다”며 “주세 인상이 불가피하다면 국민을 설득해야지 비난 여론을 피하는 데 급급하면 개편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업계는 빈틈을 노려 빠르게 움직였다. 맥주 1위 오비맥주, 소주 1위 하이트진로, 위스키 1위 디아지오는 법 개정을 앞두고 일제히 제품 가격을 5~8% 올렸다. 주세법 개정을 핑계로 술값을 올리면서 소비자들만 덤터기를 쓴 모양새다. 이처럼 ‘닳고 닳은’ 업계를 다루는 정부가 “업계 반발이 심하다”며 물러설 정도로 순진해서야 되겠나. 고차방정식일수록 잘 푸는 게 프로다.

김기환 경제정책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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