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지시 따라 했다” 10년차 넘은 판사들 변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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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이수정 사회팀 기자

이수정 사회팀 기자

“심의관의 역할은 제일 말단이고, 의사를 결정하는 간부의 지시를 따라서 하는 작업입니다.”

지난 17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시진국 창원지법 통영지원 부장판사는 심의관의 역할이 무엇이냐는 검사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제 기억에 따르면 피고인 지시로 구술받은 내용으로 기억한다.” “피고인이 제목을 그렇게 달아 달라고 했다.” 지난 2일 열린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정다주 의정부지법 부장판사도 비슷한 취지의 답을 했다. 전교조 관련 보고서 작성은 임 전 차장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는 뜻이다.

증인의 대답을 가만히 듣고 있던 재판부가 정 판사에게 물었다. “증인은 합의부에서 배석 판사로 일하면서 판결문을 쓸 때 합의대로 판결문을 쓰기가 어려우면 다시 재판부와 토의나 재합의를 했나요” 정 판사가 그렇다고 답했다. 재판부는 “행정처 근무 때는 보고서를 쓰면서 막상 이런 결론으로 쓸 수 없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요”라고 되물었다. 정 판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문건 작성은 지시자가 판단자이고, 작성자라면 단지 문서 작성에만 관여하는 경우가 있다”고 답했다. 결과가 정해진 보고서 작성 지시에 자신은 ‘받아쓰기’만 했을 뿐이란 취지다.

한 현직 판사는 이런 선배 판사의 증언에 대해 “법원행정처의 심의관으로 일했다면 적어도 10~15년은 판사로 일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1년차 판사 같은 말씀을 하실까 싶었다”며 “후배 판사로서 참담하다”고 말했다.

임종헌 전 차장 재판의 증언대에 선 전·현직 판사들의 공통된 증언은 이뿐만이 아니다. 24일 열린 재판에서 검찰은 박찬익 전 심의관이 작성한 보고서에 적힌 문구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물었다. 강제징용 보상·배상 관련 보고서에서 “(배상을 위한)재단 설립의 경우 소멸 시효 진행을 막지 않는 방법을 택해 추가 소송 가능성을 줄여야 한다”고 쓰인 부분이었다. 두어번 무슨 의미인지 묻는 검사에게 박 전 심의관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5년 전 작성된 것이고, 이 부분에 뭐라고 기재돼 있진 않아서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고 말이다.

몇해 전 판사복을 벗은 한 변호사는 “증인으로 나선 전·현직 판사들이 딱 예상되는 정도의 증언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법적 책임을 지게 될 수도 있는 부분은 “상관의 지시에 따랐다”고, 증인으로서 위증의 책임은 피해야 하니 불리한 것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한다는 것이다. 법을 가장 잘 아는 법관들이 법적 책임을 가장 잘 피할 수 있는 증언을 하는 셈이다.

이른바 ‘말단 심의관’들은 실제로는 3급 이상 공무원 대우를 받았던, 독립된 헌법 기관으로서의 판사였다. 후배 판사는 “어떻게 10년 이상 판사로 일한 선배들이 그렇게 답할 수 있냐”고 물었지만, 10년 이상 판사를 해본 선배 변호사는 “고위직으로 갈수록 자기 의견을 내긴 어렵다. 승진 욕심도 나고, 실세에 줄도 설 수 있을 것 같고. 불이익은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어쩌면 증언대에 선 그들에게는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최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을 피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 말이다.

이수정 사회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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