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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펀더멘털 트라우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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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금융팀 차장

하현옥 금융팀 차장

“번역은 한마디로 ‘말의 무게를 다는 것’이다. 저울의 한쪽에 저자의 말을 얹고 한쪽에는 번역어를 올려놓는 일이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발레리 라르보의 말이다.

비슷한 무게의 말을 찾지 못하면 외국어를 한국어로 옮기기 어렵다. ‘트라우마(trauma·정신적 외상)’나 ‘펀더멘털(fundamental·기본적인)’이 그렇다. 경제 용어로 펀더멘털은 ‘기초체력’을 의미한다. 경제성장률과 재정·경상수지, 외환보유액 등 국가 경제의 건전성을 보여주는 거시 경제지표를 일컫는다.

한국 경제를 책임지는 이들의 최근 단골 멘트 중 하나가 “경제 펀더멘털이 튼튼하다”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지난 13일 3대 국제 신용평가사 관계자와 만나 “‘한국 경제 전반의 펀더멘털이 양호하다’는 데 공감했다”고 밝혔다.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도 지난달 같은 이야기를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1월에 “거시적 경제지표가 좋다”고 말했다.

이런 낙관에도 우려는 커진다. 불안한 경제 지표 때문이다. 지난달까지 수출은 4개월 연속 감소했다. 82개월 흑자 행진에도 경상수지 흑자 폭은 쪼그라들고 있다. 한국은행은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4번이나 낮췄다. 25일 발표할 1분기 성장률이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돼서다.

1997년 9월 미셸 캉드쉬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좋다”고 했다. 당시 경제수장들도 똑같이 말했다. 그해 11월 한국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한 전직 경제 관료는 “외환위기 이후 ‘펀더멘털 트라우마’가 생겨 그 말(펀더멘털)은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펀더멘털 착시’에 빠지면 다가온 위기를 놓칠 수 있다. 그 결과로 또 다른 ‘펀더멘털 트라우마’를 겪는 관료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하현옥 금융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