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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마약상 '이 선생'의 고백 "난 얼굴마담, 넘버1은 성일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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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은 사건 현장에서 분투하는 형사들을 부르는 기자들의 은어입니다. 성별에 상관없이 ‘형사님’을 형님으로 줄여 부른 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사건 좀 아는, 수사도 할 줄 아는, 그러면서 인간미 넘치고 사회 문제도 공감할 줄 아는 ‘형님’들. 그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내는 중앙일보 연재 기획을 시작합니다. <편집자 주>

[아는형님] #'3700억원 마약 조직' 검거한 조상현 경감

필로폰 마약 밀반입 조직 10명을 검거한 조상현 경감이 3일 강원도 강릉경찰서 조사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필로폰 마약 밀반입 조직 10명을 검거한 조상현 경감이 3일 강원도 강릉경찰서 조사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벌써 두 번째 허탕이다. 대만 폭력조직인 죽련방(竹聯幇) 조직원들이 탄 BMW는 차선을 거칠게 가로지르더니 신호마저 무시하고 쏜살같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 달 전인 2018년 4월 내가 속한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 들어온 마약 첩보. 죽련방과 야쿠자들이 연관돼 있다는 얘기도 있었고, 얼굴 없는 국내 마약상 ‘이 선생’이 끼어들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없었다. 인천공항 잠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 우여곡절 끝에 놈들이 자리잡은 강남의 호텔을 찾았지만, 마음 한구석엔 ‘또 헛발질하면 어떡하나’하는 조바심이 피어올랐다.

조바심은 현실이 됐다. 온몸이 문신투성이인 조직원들은 낮에는 관광버스를 타고 관광객처럼 행세했지만, 밤만 되면 외제차를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심증은 커졌지만 물증이 없으니 대놓고 개입할 수 없었다. 차량을 놓친 뒤 허탈하게 한숨을 쉬는데, 휴대전화 진동이 귓등을 때렸다.
“어머니가 위독하십니다”

2년간 병마와 싸우던 어머니는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식장 밖에서 담배를 태우는데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허탕의 연속이던 마약 수사도 그렇게 중단됐다.

처음으로 목도한 ‘실체’ 필로폰 1.83g

실의에 빠져 있던 그해 7월, 다른 첩보가 들어왔다. 마포의 한 카페 화장실에서 ‘마약 샘플’ 거래가 있을 거란 거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사팀과 인근의 호텔, 카페 화장실을 샅샅이 뒤졌다. 잠시 뒤 수사팀원의 다급한 무전이 들렸다.
“찾았습니다. A카페 화장실에서요!”

소량이었지만 수사 후 처음으로 목도한 마약의 실체였다. 변기 뚜껑 안에 숨겨진 검은 봉지를 걷어내니 하얀 가루가 눈에 들어왔다. 중량은 1.83g.
“이제 이걸 숨긴 녀석을 찾느냐에 수사가 달린 거야”

팀원들과 밤낮없이 주변 폐쇄회로(CC)TV를 돌려보고 목격자를 탐문했다. 실마리는 의외로 인근 호텔 카페에서 풀렸다. 직원에 따르면 다소 험악한 인상의 중국인(실제 대만 죽련방 조직원)이 구글 번역기로 마약이 발견된 카페의 위치를 물었다는 것이다. CCTV에 포착된 그의 반팔 사이로 드러난 서슬 퍼런 문신. 확신이 들었다.

다시 CCTV를 뒤져 그의 발자취를 추적했다. 뭔가 수상했다. 서대문구의 한 원룸까지 걸어갔는데, 이유 없이 골목길을 빙 둘러갔다. 정식으로 용의선상에 올려 수사팀 막내 현석이(임현석 경장)를 붙였다. “현석아 출근 안 해도 되니까 녀석만 계속 커버해”

현석이는 7~8월 폭염 속에 차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남성을 따라다녔다. 그 남성은 대만 죽련방 유통책인 장웨이(가명ㆍ31)였다. 사는 곳은 영등포인데, 서대문 원룸을 이따금 들렀다. 일정한 직업도 없이 밤이면 유흥가에서 술을 퍼마셨다. 더 수상한 건 그가 대만에서 정체불명의 ‘나사제조기’를 수입해서 화성의 한 창고에 들여놨다는 것이다. 장웨이는 그 창고에서 여행가방 4개를 들고나와 원룸에 옮겨 놨다.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국정원, 관세청과 협력해 24시간 원룸을 감시했다.

며칠 뒤 장웨이가 갑자기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그가 출국하면 모든 게 수포가 된다.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공항에서 녀석을 검거했다. 그는 처음엔 혐의를 부인하다가 마약 샘플 얘기를 꺼내자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지체 없이 원룸으로 가 문을 따고 진입했다.

서대문구의 한 원룸의 여행가방에는 필로폰 112㎏이 숨겨져 있었다. 시가 3700억, 370만명이 투약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 이중 22㎏는 국내 마약상에게 전달됐다. [조상현 경감 제공]

서대문구의 한 원룸의 여행가방에는 필로폰 112㎏이 숨겨져 있었다. 시가 3700억, 370만명이 투약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 이중 22㎏는 국내 마약상에게 전달됐다. [조상현 경감 제공]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 마약수사계가 지난해 10월 15일 압수한 필로폰 90 kg을 언론에 공개하고 있다. [뉴시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 마약수사계가 지난해 10월 15일 압수한 필로폰 90 kg을 언론에 공개하고 있다. [뉴시스]

비좁은 원룸은 단출했다. 냉장고 한 대, 장롱 한 개, 여행가방 4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떨리는 손길로 여행가방을 열었다. 모두가 낮은 탄성을 질렀다.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90㎏의 필로폰이 눈앞에 펼쳐졌다. 비어 있는 비닐까지 합치면 원래 112㎏의 필로폰이 여기 놓여 있던 것이다. 시가 3700억원, 무려 370만 명이 투약할 수 있는 분량으로 역대 최대 압수량이었다.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맴돌았다.
‘이게 정말 마약일까, 밀가루인건 아닐까’

얼굴 없는 마약 거물, ‘이 선생’과 ‘성일이’를 붙잡다

무지막지한 양의 필로폰이 국내로 들어온 사연은 이랬다. 사실 마약의 대부분이 일본으로 역밀수될 예정이었다. 수법은 간단했다. 대만 죽련방의 총책은 나사제조기 내부에 필로폰 112㎏를 꾹꾹 눌러 담아 철판으로 용접해 마치 기기를 수출하는 것처럼 꾸몄다. 한국에 들여온 제조기를 유통책 장웨이가 국내에서 해체한 뒤 마약을 유통하려 한 것이다. 마약청정국 지위에 있는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마약을 보내면 단속을 피하기 수월할 거라고 판단한 듯했다.

수사는 끝나지 않았다. 사라진 마약 22㎏을 추적했다. 실제 장웨이를 추궁해보니 남은 마약을 세 봉지로 나눠 일본 야쿠자에게 전달했다고 했다. 일본 3대 야쿠자인 이나가와회(稻川會)의 유통책 H(35)였다. H는 일명 ‘콜뛰기(자동차 불법영업)’ 차량에서 장웨이에게 마약을 받은 뒤, 국내 유통책에게 11억원을 받고 되팔았다. 마약이 국내로 유통된다면 큰 일이었다. H의 행적을 추적했다. 퇴근도 반납하고 전국의 CCTV를 뒤진 끝에 대전 C호텔 앞 대로변에서 마약 거래를 하는 H를 찾아낼 수 있었다.

더 궁금한 건 건너편에서 마약 가방을 건네받은 인물이었다. 떨리는 손길로 주변 CCTV와 블랙박스 영상을 조회했다. 검은색 카니발 차량에서 내린 머리가 희끗한 60대 남성. 말로만 듣던 마약상 ‘이 선생(63ㆍ가명)’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조상현 경감이 3일 강원도 강릉경찰서 조사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조상현 경감이 3일 강원도 강릉경찰서 조사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그해 9월 이 선생은 의외로 별다른 저항 없이 수갑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조사실에선 계속 묵비권을 행사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직접 조사실에 들어갔다. 취조 대신 담배를 권하며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이 선생을 여기서 이렇게 보네요”
처음엔 외면하던 이 선생은 살아온 얘기를 하며 조금씩 입을 열었다. 가족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심경의 변화가 온 듯했다. 며칠 뒤 작심한 듯 말했다. “다들 내가 국내 마약계의 넘버원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얼굴마담입니다. 일인자는 성일이(66ㆍ가명)에요.”

증언이 이어지자 수사는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11월 오른팔 조직원과 함께 부산, 대구를 오가며 도피하던 성일이를 추적해 부산의 한 호텔에서 검거했다. 혐의를 부인하며 여유를 피우던 그는 조사실에서 경찰이 각종 증거를 제시하자 표정이 굳어졌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수사가 끝났다. 검거된 인원은 죽련방ㆍ야쿠자 조직원, 국내 마약상 등 10명. 그해 말 나는 특진을 했고, 고향인 강릉경찰서의 사이버수사팀장으로 발령받았다. 강릉경찰서에 짐을 풀고 잠시 끊었던 담배를 다시 꺼내 들었다. 1년 전 어머니를 떠나보낼 때 노랬던 하늘이 이번엔 파랗게 보였다.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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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조상현 경감 및 사건 관계자들의 심층 인터뷰 및 사건기록 등을 바탕으로 조 경감의 시점에서 작성된 스토리텔링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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