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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조양호의 죽음이 묻고 있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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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죽음이 난데없는 정치공방으로 번지고 있는데, 핵심은 그의 죽음을 과연 ‘국가 권력에 의한 간접살인’으로 볼 수 있느냐일 것이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복기해보자.

국가 권력의 오·남용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나 #기업은 기업인에겐 ‘목숨’

문재인 정부는 재계엔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노조엔 한없이 자애롭지만, 대기업엔 엄했다. 노조의 범법엔 솜방망이를, 대기업의 미운 짓엔 철퇴를 들이댔다. 기업가 정신을 북돋기보다 국민 정서법에 기댔다. 대한항공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물컵 사건은 18차례의 압수 수색으로 이어졌다. 11개 국가 기관이 동원됐다. 관세청은 6번이나 뒤졌다. 아무것도 안 나왔지만, 법원은 수색영장을 계속 발부해줬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연일 이어지는 압수 수색에 대응을 포기했다. 나중엔 그런가 보다 했다”고 했다.

그즈음 증권가엔 청와대발이라는 찌라시가 하나 돌았다. ‘정권 실세들이 삼성을  KT처럼 (주인 없는 기업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한진 사건을 시범 케이스로 활용하고 있다’는 게 골자였다. ‘장하성의 스튜어드십 코드와 김상조의 정의로운 공정경제는 실세들이 써먹기 유용한 보조 공격 수단’이란 내용도 있었다. 조양호 회장은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나중엔 “정부가 진짜 그런 생각을 가진 것 아니냐”며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작년 가을엔 각계 원로에게 자문하며 “이번 한 번만 더 (대표이사를) 하고 다음 해엔 물러나겠다”고 말해왔다. 당시 조언을 해준 A 씨는 “조 회장은 자신이 있어야 아들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게다가 자신이 유치한 6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총회를 잘 마무리하고 싶어했다”고 했다. 그런 조 회장에게 대통령이 지난 1월 “대기업 대주주의 위·탈법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 며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스튜어드십 코드를 행사할 것”이라고 한 것은 꽤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급기야 지난달 국민연금의 반대에 밀려 대표이사 연임에 실패하자 조 회장의 실의와 좌절도 깊어졌을 것이다.

이런 충격이 조 회장의 죽음을 부른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본질은 따로 있다. 조양호 회장의 죽음은 국가 권력의 오·남용이 어디까지 허용돼야 하는지 묻고 있다. 지난 정부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2016년 박근혜 정부는 한진그룹을 혹독하게 다뤘다. 조 회장을 평창올림픽 조직위원장 자리에서 사실상 통보도 없이 물러나게 했다. 위기에 몰린 한진해운엔 유독 가혹한 잣대를 들이댔다. 박 전 대통령은 “도덕적 해이, 무책임, 묵인하지 않을 것”이란 말까지 했다.

당시 조 회장은 대통령의 발언을 전해 듣고 안색이 창백해졌다고 한다. 비선 실세 최순실의 요청을 거부하다 괘씸죄에 걸렸다는 말이 돌았다. 진상을 물어보려 했지만 청와대는 “(담당 부처인) 금융위원장과 상의하라”며 잘랐다. 배임을 무릅쓰고 1000억원의 사재 출연을 약속했지만 금융위는 “1조원을 지원하라”며 막무가내였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가, 육로가 막혀 70%의 물량을 배로 실어나르는 나라가, 세계 7위, 대한민국 1위 해운사를 그렇게 퇴출시켰다.

조양호 회장은 사석에서 “한진해운을 뺏겨서가 아니다.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한진해운은 절대 없애선 안 됐다”며 두고두고 가슴앓이했다고 한다. 한국의 해운은 그때 잃은 경쟁력을 지금껏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A 씨는 “기업인에게 기업은 목숨과도 같다. 한진해운이 죽은 그때, 조 회장도 반쯤 죽은 목숨이었다”고 했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은 최근 “성공한 대기업 없이 부강한 국가는 없다”고 했다. 조양호 회장은 죽음으로 묻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대기업을 정권의 쌈짓돈으로 여기기 일쑤요, 대기업=갑질=적폐로 모는 유치한 권력들이 성공한 대기업마저 없애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무슨 보수·진보, 좌우가 있단 말인가. A 씨는 조 회장의 죽음을 “국가 권력 오·남용에 의한 살인”으로 규정하며 책임을 “박근혜 반, 문재인 반”이라고 했다. 내 생각도 그렇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