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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윤석, 불륜에 얽힌 이야기로 영화감독 데뷔한 이유는…

중앙일보

입력

영화 '미성년'으로 감독 데뷔한 김윤석을 3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났다. [사진 쇼박스]

영화 '미성년'으로 감독 데뷔한 김윤석을 3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났다. [사진 쇼박스]

“왜 어떤 사람은 잘못을 하고도 술에 취해 코골고 자고 있고,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가슴에 멍이 든 채 뜬눈으로 밤을 새울까. 인간의 진정성에 관한 이야기를 신인감독의 패기로 밀어붙였습니다.”

연기경력 30여 년, 영화 연출은 처음인 배우 김윤석(51)은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11일 개봉하는 ‘미성년’은 불륜에 얽힌 소동극이자 그의 감독 데뷔작. 못난 어른들의 우스꽝스런 행태를 10대들의 시선으로 그린 점이 신선하다. 17세 여고생 주리(김혜준)는 같은 학교 윤아(박세진)의 엄마(김소진)가 자기 아빠와 외도로 임신한 것을 알고 엄마(염정아) 몰래 수습에 나선다. 늦바람 든 아빠 역은 김윤석이 직접 연기했다.

연출 맡은 첫 영화 '미성년' 11일 개봉 #중년 남녀의 불륜에 얽힌 소동극 #여고생 딸들 시선 통해 신선한 접근

시사 이틀 뒤 그를 만났다. “편하게 얘기합시다.” 말과 달리 탁자에 바짝 붙어 앉는 모습에서 배우로 만났을 때보다 한결 긴장감이 느껴졌다.

김윤석은 마초 캐릭터? 집에 가면 여자들뿐 

영화 '미성년' 한 장면. 고등학생 주리는 아빠의 외도를 눈치채고 엄마 몰래 불륜상대를 찾아간다. 주리 역 김혜준은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왕비 역 등으로 얼굴 알린 신예다. 이번엔 500명 경쟁자를 뚫고 오디션으로 발탁됐다. [사진 쇼박스]

영화 '미성년' 한 장면. 고등학생 주리는 아빠의 외도를 눈치채고 엄마 몰래 불륜상대를 찾아간다. 주리 역 김혜준은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왕비 역 등으로 얼굴 알린 신예다. 이번엔 500명 경쟁자를 뚫고 오디션으로 발탁됐다. [사진 쇼박스]

연출에 나선 계기는.  

“늘 마음속엔 있었다. 연극을 80년대 지방에서 시작했다. 그땐 극단 사정이 워낙 열악해서 배우가 조명, 포스터 부착, 매표까지 다했다. 무대감독을 하며 공연 전체를 컨트롤도 했다. 대학 때 연극 연출로 상도 받고 서울 대학로 극단 학전에서 연출부 하면서 언젠가 영화 연출도 해보고 싶단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졌다. 더 빨리 하지, 하는 얘기도 들었는데 저는 지금이 제일 적절한 것 같다.”

감독 데뷔작에 불륜 소재를 택했는데.

“원작이 2014년 창작희곡 발표회에서 본 미완성 작품이다. 보자마자 이걸로 첫 영화연출을 해야겠다, 결심이 섰다(영화 각본은 원작자 이보람 작가와 그가 공동으로 썼다). 어른들의 위선, 나약한 모습이 아이들 대화를 통해 더 잘 보이더라. 주리와 윤아, 두 친구가 때론 싸우고 힘을 합치는 성장담에 감동 받았다. 불륜이 어찌 보면 평범한 소재잖나. 아침 8시 반에 TV 틀면 어디 한 곳에선 이 일로 싸운다. 아내도 ‘쉽지 않은 얘기지만 독특한 시각으로 다른 이면을 보여준다면 해볼 가치가 있다’고 응원해줬다.”

여성 심리를 그린 것도 의외다. ‘타짜’의 도박꾼 아귀, ‘황해’의 개장수 면가 등 마초적인 캐릭터로 존재감을 알렸는데.  

“저랑 친한 사람들은 오히려 ‘김윤석스러운 선택’이라 한다. (딸만 둘이어서) 집에 가면 저 혼자 남자다. 연극 연출도 했던 터라, 액션이나 스릴러보다 드라마와 캐릭터로 푸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남자라는) 태생적 한계는 주위 여성들과 대화하며 자문을 구했다. 공동 각본가, 편집기사, 배우들 대부분이 여자였다.”

중견 여배우들 명연기,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대원(김윤석)의 아내 영주(염정아)는 남편의 불륜 상대인 미희(김소진)의 식당을 찾아갔다가, 생각지 못한 상황에 휘말린다. [사진 쇼박스]

대원(김윤석)의 아내 영주(염정아)는 남편의 불륜 상대인 미희(김소진)의 식당을 찾아갔다가, 생각지 못한 상황에 휘말린다. [사진 쇼박스]

염정아가 배신당한 아내 영주의 감정을 눈꺼풀 떨림까지 절제미 있게 표현한다면, 영화 ‘공작’ ‘더 킹’ 등에서 짧고 굵게 인상을 남겨온 김소진은 사연 많은 싱글맘이자 내연녀 미희를 엉뚱하고 소탈하게 소화한다. 김윤석은 “중견 여성 배우들이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염정아씨 캐스팅은 드라마 ‘SKY캐슬’보다 먼저였죠. 그의 무수히 빛나는 출연작 중 영화 ‘오래된 정원’ 한윤희 역을 가장 좋아해요. 김소진씨는 영화 ‘초능력자’에 짧게 나오는 모습이 굉장히 독특했어요. 두 분 출연 수락에 들떴습니다.”

오디션으로 발탁돼 10대 여고생을 연기한 신예 김혜준‧박세진의 풋풋한 호흡도 극에 순수한 생기를 더한다. 김윤석은 “아주 갖춰져 있지 않아도 자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찾았다”고 했다. 그의 연출에 대해 염정아는 “감독님이 그럴 수 있겠구나 싶은 디테일을 콕 집어 얘기해 여러 번 와 닿았다”며 “족집게”라고 했다.

과거 아침드라마에서도 불륜남 역할, 셀프 캐스팅 이유는…

시종 지질한 모습으로 일관하다 엉뚱한 곳에 가서 된통 당하는 대원. 김윤석은 노인과 10대에게 당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낀 세대'의 처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사진 쇼박스]

시종 지질한 모습으로 일관하다 엉뚱한 곳에 가서 된통 당하는 대원. 김윤석은 노인과 10대에게 당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낀 세대'의 처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사진 쇼박스]

김윤석이 연기하는 대원은 자칫 무거워질 법한 대목에 쉼표 역할을 한다. 출산한 내연녀를 만나러 병원에 갔다가 딸과 마주쳐 허둥지둥 도망치고, 아내에겐 비굴한 변명을 늘어놓는 작태가 우습고도 지질하다. 그는 13년 전 TV 아침드라마 ‘있을 때 잘해’에서도 불륜남을 연기했다. 바람을 피워 이혼하고도 전처의 새출발을 훼방 놓는 그의 연기와 함께 시청률이 20%에 달했다.

불륜남 역할에 스스로를 캐스팅한 이유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고 비호감 캐릭터여서 동료들에게 선뜻 부탁하기 힘들었다. 캐릭터 이름도 ‘대원’이라 지은 이유가 익명성 때문이다. 사전적으로 집단을 이루는 구성원을 지칭한다. 약하고, 옹졸하고, 치사해지는 모습을 대변하는 캐릭터다. 제 구상으론 필요할 때 외엔 뒷모습‧옆모습만 나오면 됐다. 제가 직접 출연하면 페이스 조절이 편할 것 같았다.”

네 여자의 속을 썩인 대원은 엉뚱한 데서 혼쭐이 난다.  

“좀 맞아야지. 벌을 받아야 하고. 구사일생 돌아온 집에서 딸한테 듣는 말이 정말 강렬한, 정신적인 벌로 느껴지길 바랐다. 다쳐서 아내 따라 걸어가는 모습은 어디 엄마 따라가는 애 같지. 미성년도 아니고 유아다. 다만 대원으로 인한 분노가 극을 너무 장악해 정작 네 여성 주인공의 파장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비참해도 좀 실소가 나게끔 조절했다.”

‘미성년’이란 제목이 중의적인데.  

“성년이 아니란 의미도 있지만, 정말 아름다운(美‧미) 성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도 담았다. 이 영화에선 미성년자인 아이들이 더 어른스럽다. 그걸 보여주려고 마지막 장면을 한 서른 번 고친 것 같다. 좀 불편하고 호불호가 갈리더라도 어른들은 왈가왈부할 자격 없는 결말이다. 나이 구분이 인격의 완성·미완성의 구분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니잖나. 물론 해석은 자유다. 어떤 의견이든 수용할 준비가 돼 있다.”

호불호 갈릴 결말.."어른들 말할 자격 없어"

이번 영화의 주제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주리와 윤아의 우유 먹는 장면. 누군가와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아이들의 성숙한 마음을 담았다고 김윤석은 설명했다. [사진 쇼박스]

이번 영화의 주제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주리와 윤아의 우유 먹는 장면. 누군가와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아이들의 성숙한 마음을 담았다고 김윤석은 설명했다. [사진 쇼박스]

배우로서도 영화 전체를 고민하는 스타일로 알려졌다. 이번 연출 경험이 앞으로 연기에 영향을 줄까.  

“주연배우라면 대부분 작품 전체에 책임감을 느낄 것이다. (먼저 연출 데뷔한) 하정우씨가 그런 얘길 하더라. ‘(감독으로서) 모니터 앞에 앉아보시면 되게 새로운 느낌이 든다’고. 이번에 연출하다 보니 어떤 장면 연기가 헷갈릴 때 어디에 선택하고 집중해야 할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이 오더라.”

그는 “친한 감독님들이 시나리오 쓸 때 못해도 3년은 걸린다기에 너무 길다고 했는데 저는 5년이 걸렸다”며 “카메라 앞뒤를 오가며 연출‧연기를 겸하니 당이 떨어지고 뼈가 아프더라. 다음엔 하나만 하겠다”고 했다. 감독으로선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이야기를 해나가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번 영화가 은퇴작이 안돼야 기회도 올 텐데요(웃음). 우주 지키는 분들은 많으니까, 저는 주변 평범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너무 흔해서 놓친 것들, 무관심하게 지나간 것들이 어쩌면 소중하게 알아야 할 것들이 아니었나. 하나, 하나 끄집어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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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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