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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거래 사기 피해 경험, 1000만원짜리 액션영화로 만들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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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늘도 평화로운' 한 장면. 주인공 영준(손이용)의 깎다 만 헤어스타일은 극 중 그가 영화 '아저씨'의 원빈처럼 삭발하려다 중국에 갈 배시간이 시급해 멈추면서 만들어진다. [사진 꾸러기스튜디오]

영화 '오늘도 평화로운' 한 장면. 주인공 영준(손이용)의 깎다 만 헤어스타일은 극 중 그가 영화 '아저씨'의 원빈처럼 삭발하려다 중국에 갈 배시간이 시급해 멈추면서 만들어진다. [사진 꾸러기스튜디오]

영화 제작을 위해 노트북을 장만하려 한 달 내내 중고거래 사이트를 ‘눈팅’하던 청년감독. 시세의 절반, 꿈 같은 가격에 그는 “이성을 잃었고, 너무 성급히 입금”했다. 불길함은 입금 확인 전화를 끊자마자 닥쳐왔다. 이미 연락은 두절, 은행에 확인하니 3일 전 신고로 출금이 금지된 대포통장이었다.

영화 ‘오늘도 평화로운’ 백승기 감독

“경찰 말이 사기조직은 중국에 있는 것 같다는데…. 벌써 2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돈은 못 받았죠.”

22일 만난 백승기(37) 감독의 말이다. 남들은 화병으로 끝날 이런 경험담을 그는 초저예산 영화로 만들었다. 다음달 4일 개봉하는 ‘오늘도 평화로운’은 이런 방식으로 사기당한 감독 지망생 영준(손이용)이 중국에 가서 사기조직을 소탕하는 코믹 액션 활극. 현실의 불운을 뒤집은, 일명 ‘자가 힐링 체험 삶의 영화’다.

B급을 꿈꾸는 C급 영화의 맛

세 번째 영화 '오늘도 평화로운'의 개봉을 앞둔 백승기 감독. [사진 백승기]

세 번째 영화 '오늘도 평화로운'의 개봉을 앞둔 백승기 감독. [사진 백승기]

“제가 사기를 잘 당하거든요. 대학생 땐 영어회화테이프, 5년 전 홍삼. 앞으론 안 당한다 했는데…. 내상이 너무 깊어 재기불능 상태까지 바닥을 쳤다가 문득 영화로 만들자고 결심했어요.”

90분짜리 장편 제작비가 단돈 1000만원인 탓에 인천 차이나타운을 중국인 척 찍어냈다. 영화 ‘아저씨’의 원빈을 좇아 머리를 밀다가 만 주인공의 우스꽝스런 행색, 주성치 영화 ‘파괴지왕’이나 리암 니슨 주연의 ‘테이큰’ 등 유명 액션영화를 패러디한 장면들이 중독성 강한 웃음을 터뜨린다. 그 뻔뻔하고 허술함이 자칭 “B급을 지향하는 C급 영화”의 맛. 제작비가 '억소리' 나는 여느 상업영화와 전혀 다른 재미다.

그는 직접 제작사 꾸러기스튜디오를 차려 7년 전 만든 데뷔작 ‘숫호구’에선 블록버스터 영화 ‘아바타’를 패러디해 모태솔로 탈출기를 SF 코미디로 펼쳤다. 이어 ‘시발,놈:인류의 시작’에선 인류의 기원이란 주제를 무성영화 패러디에 담아 해외 로케까지 감행했다. 고등학교 후배이자, 그와 2인조 댄스그룹 ‘리스키(Risky)’로 활동 중인 배우 손이용이 주연을 도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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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허술 매력에 컬트팬 생겨

중국에 가서 곤경에 처했던 영준은 (왼쪽부터) 자신을 구해준 판웨이, 탕빙빙에게 BB탄총 사격을 배우며 사기단 소탕 작전을 세운다. [사진 꾸러기스튜디오]

중국에 가서 곤경에 처했던 영준은 (왼쪽부터) 자신을 구해준 판웨이, 탕빙빙에게 BB탄총 사격을 배우며 사기단 소탕 작전을 세운다. [사진 꾸러기스튜디오]

백승기 감독의 영화 단골 주연인 배우 손이용이 이번에도 온몸 던진 액션연기를 펼친다. [사진 꾸러기스튜디오]

백승기 감독의 영화 단골 주연인 배우 손이용이 이번에도 온몸 던진 액션연기를 펼친다. [사진 꾸러기스튜디오]

그러는 사이 백 감독에겐 컬트 팬도 생겼다. 이번 영화는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서 첫 공개됐을 때 그의 신작이란 이유만으로 순식간에 전석 매진됐다. 기획·제작‧연출‧프로듀서‧촬영‧편집까지 1인 6역을 백 감독이 했다. 전작처럼 단역 출연도 했다가 잘라냈다. 노개런티로 출연하겠다고 나선 배우들이 넘쳐서다.
“사기당한 직후 ‘SNL 코리아’ 시즌9 작가로 일할 기회가 있었어요. 메인PD님이 제 영화를 잘 봐주신 게 인연이 됐죠. 독립적인 제작방식이 더 맞단 생각에 4개월만에 나왔지만, 대중적인 코드란 걸 처음 제대로 느꼈어요. 그만둘 시기에 제 페이스북에 이 영화 두 줄 시놉과 함께 너무 만들고 싶은데 사기당해서 돈이 없다,함께할 분 찾는다, 뭐든 해보고 싶은 걸 제시해주시면 최대한 활용하겠다고 하소연을 썼어요. 일주일 만에 50명 넘게 모였죠. 대부분 배우를 원하셔서 캐릭터, 사연, 대사를 다 짜서 모두 출연시켰는데 찍으니 3시간이 넘더라고요. 결국 양해를 구하고 조금씩 편집했죠.” 절정부를 이루는 집단 결투신에는 대사 없이도 남다른 개성의 캐릭터 50여명이 총출동했다.

'벽돌사기' 중고나라 본사 가보니…

왼쪽부터 백승기 감독의 데뷔작 '숫호구'(2014), '시발,놈:인류의 시작'(2017) '오늘도 평화로운'(2019).

왼쪽부터 백승기 감독의 데뷔작 '숫호구'(2014), '시발,놈:인류의 시작'(2017) '오늘도 평화로운'(2019).

유명 중고거래 사이트의 실화도 담겼다. 택배 상자를 열었더니 주문한 중고물품 대신 벽돌이 들어있는 장면이 한 예다. 영화 포스터 속 리본 묶인 벽돌의 의미다. 백 감독은 “중고나라 벽돌 사기가 워낙 유명하다”면서 “극 중 중고나라 이름이 나오진 않지만, 기분 나빠하시면 어쩌나, 개봉 전 보여드렸더니 오히려 재밌어하시더라. 본사 내부에 이미 (재발을 방지하잔 자성의 의미로) 벽돌이 전시돼있는 걸 보고 놀랐다”고 귀띔했다.

‘Super Virgin(숫호구)’ ‘Super Origin(시발, 놈)’ 이어 ‘Super Margin(오늘도 평화로운)’까지, 영어제목마다 ‘수퍼(Super)’가 들어가는 그의 영화들은 허구의 우주가 아닌 평범한 인간사 속 작은 영웅들의 얘기처럼도 느껴진다.

미술을 전공한 그는 제작비 마련을 위해 종종 기간제 미술교사로 일하는데 가장 최근의 한 고교에서는 학생들과 머리를 맞대고 ‘수시로 히어로’란 단편을 찍었다. 어릴 적부터 수퍼 히어로를 꿈꾸던 전교회장이 시시콜콜한 재능의 친구들과 교내 히어로 활동을 하다 내분을 겪는 얘기다.

“시험 기간이 오자 어벤져스처럼 갈등이 일어나요. 전교회장은 히어로 활동은 ‘수시로’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아이들은 자기네는 ‘수시전형’ 특이이력 남기려고 히어로 동아리 하는 거라 반발하죠. 진짜 하고 싶은 것과 대학 가기 위해 하는 것 사이의 괴리감을 그렸어요.” 백 감독의 설명이다.

"메이드 인 차이나 같은 감독 되고 싶어요"

인류의 기원을 다룬 전작 '시발,놈:인류의 시작'에서 유인원 역으로 단역 출연한 백승기 감독.

인류의 기원을 다룬 전작 '시발,놈:인류의 시작'에서 유인원 역으로 단역 출연한 백승기 감독.

세 번째 장편을 만들기까지, 그에겐 사기 외에도 힘든 순간이 있었다. 나름 영화사의 투자(1000만원)까지 받아 에너지를 쏟은 전작 ‘시발, 놈’이 데뷔작보다 저조한 성적을 낸 것. “며칠 혼자 집에 틀어박힐 만큼 공허감이 왔다. 인정받으며 영화 만들 길이 단절된 듯 힘들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다시 힘을 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10년 넘게 영화해온 이유가, 공동작업이잖아요. 제 고향 인천이나 주변 사람들의 가치를 발견해서 보여주는 작업이 재밌어요. 다 같이 만들고 개봉하며 우리가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는 맛도 있고요.”

그러면서 “각박한 세상” 얘길 꺼냈다. “학교에서 만난 제자들이 커서 생활하는 것 보면, 그 파릇파릇했던 애들이 다들 하고 싶은 일 못하고 지옥 같은 현실에 시달리고 있다”면서 “영화를 만들 땐 그런 세상에 숨통을 틔우고 싶은 마음도 크다”고 했다.

“가장 베스트는 지금 제작 시스템을 지속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죠. 이번 영화 손익분기점이 5000명 정도인데, 수익이 나면 단역 주역 차별 없이 N분의 1로 나누려고 해요. 다른 현장에선 기회를 못 잡은 배우들, 저처럼 돈 없어서 영화 못 찍는 제작진과 앞으로도 재밌게 영화를 찍을 수 있기만 바랍니다. 저가형 메리트를 십분 살린 ‘메이드 인 차이나’ 같은 감독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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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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