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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모은 도서관 책 3000권 잿더미, 아이들 찾던 곳인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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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호 03면

강원 초대형 산불

5일 강원도 속초시 장천마을의 한 주민이 불타버린 집을 바라보고 있다. 4일 오후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서 발생한 산불은 강한 바람을 타고 동쪽으로 번져 1시간 30여분 만에 약 7.2㎞ 떨어진 속초시 장사동 해안까지 이르렀다. [장진영 기자]

5일 강원도 속초시 장천마을의 한 주민이 불타버린 집을 바라보고 있다. 4일 오후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서 발생한 산불은 강한 바람을 타고 동쪽으로 번져 1시간 30여분 만에 약 7.2㎞ 떨어진 속초시 장사동 해안까지 이르렀다. [장진영 기자]

“동네 꼬마들이 날마다 찾아와 그림 책보며 놀던 도서관인데….”

산불 현장 르포 #고성군 ‘작은 책마을’ 다 사라져 #“책 기증받아도 도서관 못 열 것” #대피한 주민들 뜬눈으로 밤 새 #“주먹만한 불덩이가 날아다녀 #틀니·휴대전화도 못챙기고 나와”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용촌리에 사는 박영숙(62·여)씨는 지난 4일 발생한 산불로 8년 동안 모아 온 책 3000여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곳은 화재가 시작된 지역이다. 박씨는 2011년부터 마을에 ‘빨간머리 앤의 작은 책마을’을 운영해왔다. 도서관에는 소설책과 동화책, 그림책, 원예집, 약초집, 요리책이 가득했었다. 책은 박씨가 오랜 기간 수집하거나 마을 주민, 고성군, 파주 출판문화단지 등에서 기증받은 것이다.

불이 나기 전까진 매일같이 20여명의 동네 꼬마들이 찾아와 그림책과 동화책을 보여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박씨는 한쪽에 마련된 체험실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미술 교육도 했다. 박씨는 “조손가정 아이가 갈 곳 없어 길가에 온종일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편하게 놀 수 있는 공간으로 도서관 만들었는데 애정을 쏟았던 공간이 한순간에 사라졌다”며 “다시 책을 기증받는다 해도 도서관을 열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토성면 용촌리에선 마을 곳곳의 주택이 전소했다. 용촌1리 마을회관 앞 주택의 경우 한쪽 벽면만 남았을 뿐 집 안에 있던 가전제품 등은 불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숨진 50대, 누나 집 불 끄러 왔다 참변

전소된 주택 앞에서 만난 박인자(56)씨는 "당시 어머니 혼자 집에 있었는데 옆집 아주머니가 ‘불이야’ 소리 지르는 것을 듣고 몸만 빠져나왔다”며 “틀니와 휴대전화도 못 챙겨 나올 정도로 급박한 순간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인근에 사는 이현힐(63)씨의 외양간도 불에 탔다. 그는 “송아지 두 마리가 그을린 채 바닥에 쓰러져 죽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대피하기 직전 주먹만 한 불덩이가 나무 위를 날아다녔다”며 “산불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지 처음 알았다”고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이번 산불로 사망자가 나온 곳도 토성면이다.  숨진 김모(59)씨의 형(62)은 속초의 한 장례식장에서 취재진에게 “(숨진) 동생이 사는 곳은 속초시 영랑동인데 토성면에 사는 누나(67)의 전화를 받고 누나를 대피시키러 왔다가 화를 당했다”고 말했다. 동생 김씨는 강풍을 타고 날아든 불씨로 누나 집에 불이 붙자 수돗물을 이용해 불을 끄려 했고 이 때 갑자기 시커먼 연기가 김씨를 덮쳐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는 것이다. 형은 “누나가 사는 마을까지 산불이 내려오면서 대피령이 내려졌는데 누나가 피할 방법이 없자 동생이 누나를 구하러 간 것”이라고 말했다.

고성지역의 경우 산불로 인해 105채 주택이 불에 탔다. 속초지역도 20채나 산불 피해를 봤다. 주택이 불에 타거나 화재 위험으로 대피한 주민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대피소에 온 주민들은 제공된 담요를 덮고 누워 눈을 붙이려 노력했지만, 혹시나 집이 불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난 4일 오후부터 고성 아야진초교와 속초 생활체육관 등 총 17개 대피소에서 밤을 보낸 이들은 4230여 명이다.

이번 산불은 고성과 속초 주민들의 삶의 터전은 물론 소중한 추억 등을 앗아갔다. 이날 오전 강원도 속초시 장사동 속초고교 앞 주택. 산불이 옮겨붙어 전소한 집 앞에서 백발의 할머니가 목놓아 울고 있었다. 김정자(83·여)씨는 “불이 붙으면 위험하니 빨리 대피하라고 해 손녀와 함께 급하게 나오느라 남편 사진 한장도 못 챙겼다”며 “이제 우리는 어디서 살아야 하냐”고 말했다.

속초시 동명동에선 8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의 주택 전체가 불에 타기도 했다.  주민 박상철(58)씨는 “불씨가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모습을 보고 5남매와 함께 탈출했다”며 “지인 아파트에서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아침에 집에 와보니 창고와 차량이 불에 타 있었다”고 말했다.

전국 ‘소방차 어벤저스’ 800여 대 출동

전국의 소방관들이 고성·속초 주민들의 생명을 구조하기 위해 소방차 800여 대를 타고 출동하는 CCTV 영상이 이날 하루 종일 주목을 끌었다. SNS에선 산불 현장에 달려 가는 소방관들을 격려하고 응원하기 위해 #어벤저스라는 해시태그를 단 글이 이어졌다.

고성·속초=박진호·김나현 기자 park.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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