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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속 30m 양간지풍의 저주…‘도깨비불’ 수백m 날아가 번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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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호 02면

강원 초대형 산불

4·5일 이틀간 강원도 고성·강릉 일대에서 산불이 빠르게 번지게 된 데엔 ‘양간지풍(襄杆之風)’ 또는 ‘양강지풍’(襄江之風)이라고 불리는 강풍이 큰 역할을 했다.  양간지풍은 양양과 간성, 양강지풍은 양양과 강릉 사이에 부는 국지적 강풍을 말한다. 고온 건조한 데다 소형 태풍급에 버금갈 정도로 풍속도 빠르다. 봄철만 되면 강원도 공무원을 긴장시키는 바람이다. 이러한 국지성 강풍은 봄철 ‘남고북저’ 기압배치에서 서풍기류가 형성될 때 발생한다. 한반도 남쪽 고기압과 북쪽 저기압 사이 강한 서풍이 밀려와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안에 더 건조한 바람이 부는 것이다.

산불 확산 원인 #봄철 남고북저 기압으로 서풍 발생 #태백산맥서 역전층 생겨 강한 바람 #간벌 안된 빽빽한 소나무림에 불 #확산 속도 빨라 진화하기 어려워 #1시간 만에 5㎞ 떨어진 곳 초토화

2005년 낙산사 화재 때도 초속 32m 강풍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양간지풍은 1633년 이식의 『수성지』에, 양강지풍은 1751년(영조 27년)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등장할 정도로 악명 높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성종 20년인 1489년 3월 25일 강원도 양양에서 큰 산불이 발생해 민가 205채와 낙산사 관음전이 불탄 사실이 기록됐다.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에서는 향교와 민가 200채가 전소했다고 한다.

국립기상연구소가 2012년 발표한 동해안의 대형 산불 피해 원인 분석에 따르면 봄철 남고북저(南高北低)의 기압 배치에서 서풍 기류가 형성되고, 온난한 성질의 이동성 고기압이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이동하면 태백산맥 위 해발 1500m 상공에 기온 역전층이 형성된다. 보통 높이 올라갈수록 기온이 낮아지지만 기온 역전층이 형성되면 위로 갈수록 기온이 높아진다. 이렇게 되면 찬 공기는 기온 역전층과 태백산맥 산등성이 사이의 좁은 틈새로 지나가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찬 공기가 압축돼 공기 흐름이 빨라지고 산맥 경사면을 타고 영동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강한 바람이 불게 되는 것이다. 이때 풍속이 여름 태풍 수준인 초속 32m에 이른 적도 있다.

실제로 이번에도 영동지역에서는 강한 바람이 관측됐다. 4일 고성과 속초지역에서 관측된 최대순간 풍속은 미시령 초속 35.6m, 양양공항 초속 29.5m, 설악산 초속 28.7m, 속초 설악동 초속 25.8m, 강릉 연곡 초속 25.2m였다. 2005년 4월 천년고찰인 낙산사를 덮친당시 산불 역시 순간 최대풍속이 초속 32m인 바람을 타고 빠르게 확산됐다. 강한 바람에 불똥이 날아가 새로운 산불을 만드는 ‘비화(飛火)’ 현상도 나타난다. ‘도깨비불’처럼 수백m씩 날아가 옮겨붙는 탓에 진화에 어려움이 크다.

강원도 고성·속초 일대에서 발생한 산불 진화작업이 계속된 5일 오후 8군단 산불감시조 장병들이 고성군 토성면의 한 식당에서 등짐펌프와 삽을 이용해 잔불을 제거하고 있다. [뉴스1]

강원도 고성·속초 일대에서 발생한 산불 진화작업이 계속된 5일 오후 8군단 산불감시조 장병들이 고성군 토성면의 한 식당에서 등짐펌프와 삽을 이용해 잔불을 제거하고 있다. [뉴스1]

산림과학원이 2016년 3월 분석한 결과 바람이 없을 때는 30도 경사에서 산불이 분당 0.57m의 느린 속도로 확산했다. 이에 비해 바람이 초당 6m 속도로 불면 화염이 높아지고, 분당 최고 15m 속도로 불의 확산 속도가 빨라졌다. 외국 사례를 보면, 산림에서는 불이 시속 10.8㎞로, 초지에서는 시속 22㎞ 속도로 번지기도 한다. 2017년 10월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에서 발생한 산불은 시속 130㎞(초속 36m)의 강풍이 부는 탓에 빠르게 확산했다. 당시에는 단 3초 만에 축구장 하나가 타버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조선시대 고서에도 ‘양간지풍’ 등 언급

2009년 산림과학원 분석도 주목할 대목이다. 산림과학원에 따르면 산불은 주로 남향의 산림에서 발생한 뒤 서풍의 영향을 받아 번지기 시작하고, 지형의 영향을 받아 북쪽이나 동쪽으로도 번진다. 산림과학원은 또 산불의 64%는 발화지점에서 100m 이내에서 수관화(樹冠火)로 이어진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수관화는 나무의 가지나 잎이 무성한 부분만을 태우며 빠르게 지나가는 산불을 말한다. 확산 속도가 빨라 인력으로는 진화하기 어렵다. 숲 가꾸기(간벌)가 안 된 빽빽한 소나무림에서는 발화지점의 20m 이내에서 수관화로 번졌다. 수관화로 진행되기 전, 산불 발생지점 100m 이내에서 신속하게 진화해야 대형 산불을 막을 수 있다는 얘기다.

산불 피해지역 중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경사면 지역이다. 경사면을 타고 불이 빠르게 확산되기 때문이다. 또한 뜨거운 산불로 인해 발생하는 상승기류를 타고 불꽃이 먼 거리로 이동하는 경우 새로운 불로 번져 피해가 더욱 커질 수 있다.

국지성 강풍으로 인한 영동지역의 대형 산불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6년 3천762ha를 태운 고성과 1998년 강릉 사천(301ha), 2000년 동해안 4개 시·군(2만3천138ha), 2004년 속초 청대산(180ha)과 강릉 옥계(430ha), 2005년 양양(1천141ha) 등에서 대형산불이 끊이질 않았다. 12년 동안 잠잠하던 동해안 산불은 2017년 삼척(765ha)과 강릉(252ha)에서 악몽을 재현했다. 지난해 2월 삼척 노곡(161ha)과 도계(76ha)에 이어 그해 3월 고성 간성에서 356ha 산림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지난해 11월 89명의 사상자를 내며 미국 캘리포니아주 최악의 재난으로 기록된 산불 ‘캠프파이어’의 위력을 키운 것도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인근에 불어닥친 속도 80~90㎞의 강풍이었다. 지난달 30일 중국 쓰촨성 산불도 건조한 강풍이 피해를 키웠다. 해발 4,000m 고산지대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중국 소방 당국은 소방관 700여명을 투입했다. 그러나 진화 작업 도중 산간에서 불던 바람 방향이 갑자기 바뀌며  소방관 30여 명이 불길에 갇혀 사망하기도 했다.

고성·강릉=박진호·김나현·편광현 기자
강찬수 환경전문기자 kang.chan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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