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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줌마의 힘 … 글로벌 기업 제품 디자인도 바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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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달 5일 미국 위스콘신주 레이신에 있는 다국적 생활용품 기업 SC존슨앤드선(Johnson & Son) 본사. 이 회사의 한국법인인 한국존슨의 양정선 차장은 각국 살충제팀 대표가 모인 'IC(Insect Control) 팀매니저 회의'에서 기립 박수를 받았다. 한국존슨이 자체 개발한 붙이는 바퀴벌레 살충제 '레이드 골드'가 최우수 개발품으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까만 동그라미 형태였던 기존 살충제와 달리 이 살충제는 부채꼴과 스틱, 두 가지 형태로 제작됐다. 둥그런 코너나 좁은 틈새에도 잘 붙일 수 있도록 모양을 바꾼 것이다. 최근의 가구 인테리어 경향을 고려해 색깔도 연한 금색으로 했다.

이 회사는 제품을 개발한 1970년대 말부터 까만 동그라미 형태의 디자인을 고집했다. 하지만 지난해 말 한국존슨 소비자상담실로 걸려 온 한 주부의 전화 때문에 디자인을 바꿨다. "바퀴가 자주 다니는 싱크대 다리 등에 살충제를 붙일 수 없어 불편해요. 검은색도 눈에 잘 띄어 손님이 올 때 '바퀴벌레가 많은 집'으로 인식돼 민망합니다." 한국존슨 측이 즉각 주부 여론조사를 해 봤더니 대부분 이 의견에 공감했다. 회사는 곧 제품 개발에 들어갔고 6개월여의 연구 끝에 신제품을 내놓았다. 한국에서 개발된 이 제품은 최근 대만.태국 등 동남아 각지로 수출되고 있다.

한국존슨 리차드스 대표는 "영국.헝가리 등에서도 일했지만 한국 주부만큼 제품 개발과 피드백에 적극적인 경우는 없었다"며 "'한국 아줌마 파워'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30년의 고정 관념을 깼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아줌마 파워'가 대단하다. 단순한 조언자에 그치는 게 아니라 직접 상품 개발자까지 되고 있다. 주부들이 낸 아이디어가 세계적 히트상품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독일계 주방용품 업체인 휘슬러는 2년 전 독일 공장에 아예 한국 소비자를 위한 생산라인을 만들었다. 이 회사 압력솥 제품의 크기를 줄여 달라는 한국 주부들의 요청이 쇄도했기 때문이다. 원래 제품은 고기 요리를 하기 적합하게 4.0ℓ짜리로 제작됐기 때문에 2, 3인분의 밥을 짓기엔 용량이 큰 편이었다.

한국 주부들은 휘슬러 한국지사뿐만 아니라 본사에까지 직접 e-메일을 보냈다. 이에 본사는 1년여의 연구를 거쳐 지난해 2월 1.8ℓ짜리 소형 압력솥을 생산, 전 세계에서 처음 한국에 선보였다. 한국형 부엌에 맞게 손잡이 단열 부분도 보완했다. 한국 주부의 성화로 탄생한 이 제품은 조만간 일본.중국에도 진출한다.

외식업체도 마찬가지다. 세계적 프랜차이즈라 할지라도 본사의 방식이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고집은 한국에선 통하지 않는다.

패밀리 레스토랑 아웃백스테이크는 손님들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간단한 요리와 음료를 미리 주는 '웨이팅 푸드 서비스'를 하고 있다. 이는 주부 고객의 의견을 반영,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것이다. 식사 전에 애피타이저로 먹는 빵을 식사 후 하나씩 포장해 나눠 주는 것도 "빵 좀 더 가져가면 안 되겠느냐"는 주부들의 요청이 몰리면서 시작된 서비스다. 현재 이런 서비스는 다른 패밀리 레스토랑에도 퍼져 '업계 표준'이 됐다.

유니레버코리아의 정경희 브랜드 매니저는 "아무리 국제적으로 검증받은 제품이라도 한국에선 새로운 전략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한국에선 주부들이 제품의 사양을 바꿀 정도로 엄청난 파워를 행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선구.염태정.김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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