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PANY] 수건 밖에 난 몰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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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큰 목욕 타월 있으세요?" 송월타월 광고방송의 한 멘트다. 박찬호 선수 등이 출전하는 메이저리그 야구를 케이블TV로 즐기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이 광고를 들었을 것이다. 20~30대 젊은층은 이 광고를 통해 송월타월을 접하지만 40대 이상에게는 '송월'은 '수건'이라는 보통명사와 같은 말이다. 시장 점유율 35%. '××기념', 'OO축하' 등이 찍혀 있는 수건 3장 중 1장은 송월타월이 만든 것이다. 3년 전 법원화의에서 벗어난 송월타월이 '수건 신화'를 다시 쓸 채비를 갖추고 있다.

◆송월은 수건의 역사=1940년대 부산에 정착해 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용 수건과 양말을 표백해 되파는 일로 생계를 잇던 고(故) 박동수 창업주. 그는 40년대 말 자전거 페달를 이용해 나무 직기를 손수 만들었다. 나무직기 5대를 들여놓고 '송월타올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건 것은 49년 10월. 일반인에게는 수건보다 행주치마가 익숙하던 시절이었다. 60년대 각종 기관과 기업들이 기념품으로 수건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송월은 성장 가도를 달렸다. 66년 일본에서 반자동 직기를 도입했고 늘어난 생산량의 절반 이상은 해외로 팔려나갔다. 70년대 송월은 직원 수 1000명이 넘는 대기업이 됐다.

◆57년 장수비결은 '사람'=80년대 중반을 정점으로 섬유산업이 사양길로 들어서면서 송월도 어려움을 겪었다. 인건비가 크게 오르면서 수출가격 경쟁력이 떨어졌다. 86년 자동화 설비를 도입하고 수출보다는 내수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구조조정도 했다. 당시 1300명에 이르던 송월가족은 지금 280여 명까지 줄었다. 사무직의 대부분은 30대. 세대교체도 이뤘다.

인위적인 감원은 하지 않으면서 20년간 차근차근 구조조정을 한 결과다. 박 창업주의 경영철학은 '사람이 곧 재산'이다. 그는 '오래할 사람'을 기준으로 대리점주를 골랐다. 장사가 잘된다고 크게 늘리지도, 실적이 좀 떨어진다고 쉽게 바꾸지도 않는다. 현재 대부분의 대리점은 송월과 인연을 맺은 지 20년이 넘었다. 대를 이어 대리점을 하는 곳도 여럿이다. 98년 외환위기 당시 금융사의 무차별 채권 회수로 회사가 존폐 기로에 섰을 때 대리점주들이 도왔다. 대리점주들은 물건도 받기전에 물건 값을 회사로 보냈다. 회사는 법원에 화의를 신청했고 노조는 30% 임금삭감을 자청해 회사 회생에 힘을 보탰다.

◆제2의 도움닫기=송월타월은 올해 초 경남 양산 신공장을 가동하고, 장당 5000원이 넘는 고급 수건을 만든다. 영업담당 김우람 이사는 "향후 5년 내에 유럽과 미국에 판매거점을 확보해 미국의 마텍스 등 수건 하나로 수천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기업들과 어깨를 겨룰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사 박병대 사장은 '고급제품'에 승부수를 던졌다. 박 사장은 박 창업주의 동생 찬수씨의 막내아들이다. 회사의 수익이 급격이 나빠지자 박 창업주는 92년 전자부품 제조업으로 자수성가한 박 사장을 불렀다. 박 사장은 "차별화된 고부가가치 상품을 만들면 수건이 사양제품일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박 사장이 부임 직후 수출시장을 겨냥해 독자 브랜드 '샤보렌'을 출시하고 올해 초 면만큼 물을 흡수하면서도 면보다 부드러운 대나무 섬유소재로 만든 수건 '뱀부얀'를 내놓은 것도 고급화 전략의 하나다. 송월타월은 지난해 526억원의 매출에 64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임장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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