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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 가문의 탄광 징용 잔혹사···위령비 '조선인' 글자도 막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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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후쿠오카(福岡) 공항에서 차를 타고 동쪽으로 약 1시간을 달려, 다가와(田川)로 향했다. 다가와는 일본 3대 석탄생산지인 후쿠오카현 지쿠호(筑豊) 지역의 대표적인 탄광지다. 이곳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약 15만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강제동원됐다.

[르포] '아소 탄광' 강제징용 현장을 가다 #일제 군수물자 납품하던 시멘트공장서 #조선인 징용노동자 1000여명 혹사 #재일사학자 노력에 납골당 위령비 안치 #

석탄과 석회석은 전쟁 중인 일본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물자였다. 이 지역 사람들은 석탄을 ‘검은 다이아몬드’, 석회석을 ‘하얀 다이아몬드’라고 불렀다. 지쿠호 지역에서 채굴된 석탄과 석회석은 야하타(八幡) 제철소(현 신일철주금)로 보내졌고, 여기서 생산된 철강 제품은 나가사키(長崎) 등에서 군함, 전투기 같은 군수물자를 만드는데 쓰였다.

후쿠오카현 다가와에 있는 아소시멘트 공장 전경. 공장벽면에 아소 가문의 문양이 붙어있다. 윤설영 특파원

후쿠오카현 다가와에 있는 아소시멘트 공장 전경. 공장벽면에 아소 가문의 문양이 붙어있다. 윤설영 특파원

덤프트럭과 대형 레미콘이 줄 지어 가는 곳으로 따라들어 가자, 거대한 공장건물이 나타났다. ‘안전 제일’이라고 쓰인 공장 벽면에 아소(麻生) 집안의 문양이 또렷이 새겨져있었다. 1919년부터 아소 일가가 운영하고 있는 아소시멘트 공장이다.

아소광업은 1969년 석탄사업에서 손을 떼면서 아소산업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아소시멘트는 지금도 아소그룹의 핵심 사업체다.

1939년 당시 아소시멘트에는 약 10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 취재에 동행한 재일사학자 박광수씨는 “석탄 탄광에선 다이나마이트를 사용해 작업하다가 한번씩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했지만, 석회석 탄광에선 중노동으로 인해 하루에 한두명씩 죽어나갔다”고 설명했다. “1940년대 이후 조선인 노동자가 크게 늘어 조선인 기숙사가 별도로 있었는데, 자유가 없는 수감소 같은 생활이었다”고도 덧붙였다.

노동환경도 처참했다.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구타를 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1944년 후쿠오카현이 작성한 ‘이입반도인(조선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표’에 따르면 아소광업의 노동자 7996명 가운데 4919명이 도주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노동자의 61.5%가 도주할 정도로 현장의 노동환경이 열악했다는 얘기다.

재일 사학자인 박강수씨가 아소시멘트 공장 인근 미타테 공동묘지에 있는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를 설명하고 있다. 윤설영 특파원

재일 사학자인 박강수씨가 아소시멘트 공장 인근 미타테 공동묘지에 있는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를 설명하고 있다. 윤설영 특파원

박씨의 안내를 받아 인근 미타테 공동묘지로 발길을 옮겼다. 작은 납골당의 철문을 열자 하얀 강목에 싸인 유골함이 2층 선반에 나란히 놓여있었다. 왼편으로 박OO, 김OO 등 조선인 이름이 적힌 유골함이, 오른편에는 일본인으로 추정되는 이름들이 적힌 유골함이 놓여있었다. 무(無)라고 적힌 이름없는 유골함도 여럿 있었다.

박씨는 “조선인 14기, 일본인 18기가 모셔져 있는데, 아소시멘트에서 일한 노동자나 노동자 가족으로 추정된다”면서 “당시 창씨개명을 했던 걸 감안하면 조선인 유골은 더 많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유골들은 1976년 아나간논(穴観音)이라는 작은 사찰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당시 재일 사학자인 고(故)김광열씨가 발견해 납골당으로 안치한 것이다.

납골당 내부에 안치되어있는 유골함. 하얀 천 위에 박OO, 김OO 등 조선인의 이름이 적혀있다. 윤설영 특파원

납골당 내부에 안치되어있는 유골함. 하얀 천 위에 박OO, 김OO 등 조선인의 이름이 적혀있다. 윤설영 특파원

하지만 납골당 위로 세워진 위령비에는 ‘조선인’이라는 글자조차 없었다. 당시 아소시멘트 측과 교섭을 벌여 위령비와 납골당을 마련했는데, 아소시멘트 측에선 끝까지 ‘조선인’이라고 새겨넣는 걸 거부했다고 한다. 박씨는 “지금도 매년 아소시멘트 관계자들이 위령제를 지내지만 특별히 조선인 노동자를 기리는 건 아니다. 당시 역사를 아는 사람이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다.

태평양전쟁(1941년~45년) 말기가 되면 지쿠호 지방의 조선인 노동자의 수가 급증한다. 일제가 국민징용령을 조선에도 적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 10대 중·고등학생까지 징병했던 일제는 부족한 노동력을 조선인, 중국인으로 채울 수 밖에 없었다.

일본석탄통제회에 따르면 지쿠호 지방의 조선인 노동자 비율은 1941년 13.36%(9213명)에서 불과 3년 뒤인 1944년 32.94%(3만79명)으로 3배 이상으로 늘어난다.

다가와에서 멀지 않은 이즈카(飯塚) 역시 주요 석탄생산지였다. 이즈카는 아소가(家)의 영지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곳곳에서 아소가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시 중심부에는 아소 이즈카 종합병원과 아소 전문학교, 아소 마트가 있고, 곳곳에 아소 다로(麻生太郎) 부총리의 선거 벽보가 붙어있었다. 아소 부총리는 이곳에서 총 13번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후쿠오카현 이즈카시에 있는 아소 본가(本家). 으리으리한 대문이 집 주인의 위세를 가늠케 한다. 윤설영 특파원.

후쿠오카현 이즈카시에 있는 아소 본가(本家). 으리으리한 대문이 집 주인의 위세를 가늠케 한다. 윤설영 특파원.

아소광업의 창업주 아소 다키치(麻生太吉)가 바로 아소 부총리의 증조부다. 이즈카에 있는 아소 본가엔 지금도 아소가 사람들이 살고있다. 높이가 2m쯤 되는 담벼락이 100m 이상 이어졌다. 으리으리한 대문을 지나 한참을 걸어들어가자, 운동장만한 정원이 나타났다.

후쿠오카현 이즈카시에 있는 아소 다로 부총리의 선거 포스터. 아소는 이 곳에서 총 13번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윤설영 특파원.

후쿠오카현 이즈카시에 있는 아소 다로 부총리의 선거 포스터. 아소는 이 곳에서 총 13번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윤설영 특파원.

주택 관리인은 기자에게 “아소 집안은 벼락부자(成金·なりきん)”라고 몇번이고 강조했다. 아소광업을 모태로 한 아소그룹은 현재 90개 자회사를 거느린 중견 그룹으로 성장했다. 아소 다로 부총리의 장인은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전 총리, 외조부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총리다.

다가와, 이즈카=윤설영 특파원 snow0@joongang.co.kr

도쿄대 도노무라 교수 "한ㆍ일 모두 역사 교육 필요"


일제강점기 역사를 연구해온 도노무라 마사루(外村大) 도쿄대 교수는 현 아베 정권이 징용문제에 있어서 강제성을 희석시키려는 움직임에 대해 “강제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당시 조선인에게는 일본 정책에 따르지 않을 자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도노무라 교수를 지난 1일 도쿄대 고마바(駒場) 캠퍼스에서 만났다.

도노무라 마사루(外村大) 도쿄대 교수. 윤설영 특파원

도노무라 마사루(外村大) 도쿄대 교수. 윤설영 특파원

태평양전쟁 말기 조선인 노동자가 급증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엔 일본 국내 전체의 노동력이 달렸다. 전쟁 중이었고 국내에서도 여러 공사를 벌였다. 탄광은 육체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노동력의 공급원이 조선인, 중국인 밖에 없었다. 당시엔 소수의 대규모 탄광 외에는 기계화된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인력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탄광의 노동환경은 어땠나
기본적으로 야쿠자들이 관리했다. 사람들이 도망가거나 하면, 다시 끌고와서 린치를 가하고 하는 일이 어느 탄광이든 대부분 비슷했다. 전쟁 중엔 안전대책을 마련할 여유가 없어 사고가 다발할 수 밖에 없었다.
아베 정권은 강제징용 노동자가 자유의지로 온 경우도 있다면서 강제성을 부인하고 있다.
강제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당시 조선인에게 일본 정부 국책에 따르지 않을 자유는 없었다. 일본이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할 때 일본인들은 의회에 자신들의 대표자가 있었지만, 조선인은 그렇지 않았다. 자기 결정권이 전혀 없었다. 또 경찰한테 맞아서 억지로 끌려온 케이스와 그걸 보고 무서워서 반항하지 못하고 끌려온 경우, 누구는 강제이고 누구는 강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나. 법(국민총동원법)이 있어서 강제로 왔다든지 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는 논쟁이다.
일본 외무성은 국민징용령이 조선인에 적용되기 시작한 1944년 이후부터가 징용이라는 입장이다.
외무성 설명을 보면 ‘국가총동원법제 4조에 근거한 국민징용령에 의한 모집, 관알선 및 징용이 이뤄졌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모집은 조선총독부령인 조선직업소개령(朝鮮職業紹介令), 관알선은 조선총독부의 ‘조선인내지이입알선요강(朝鮮人内地移入斡旋要綱)’에 의한 것이다. 둘 다 조선총독부 하에 민간기업이 관여한 것이다. 전쟁 중의 법률은 워낙 복잡하기는 하지만, 자기 선배들이 만든 법률은 제대로 공부해서 설명했으면 좋겠다. 일본인으로서 유감이다. 또 ‘이입’이라는 단어가 당시 쓰이긴 했지만, 보통은 물자를 가리킬 때 쓰는 용어다. 조선인을 물건으로 본다는 사고방식인데 현재 일본 정부 공무원이 사용했다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 이후 한일관계는 상당히 악화됐다. 해결책이라면.
근본적으로 역사교육을 제대로 할 필요가 있다. 한국, 일본 모두 과제가 있다. 언론도 서로 과격한 움직임만 보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일본에선 식민지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거의 다 돌아가시고 없다. 모두 전후(前後)세대이기 때문에, 한국인이 (역사문제로) 비판하면 마치 일본인 전부를 비판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군함도의 경우, 그곳에서 혹사당한 조선인이 있었다는 걸 일본인도 알아야 하지만, 거기 살았던 사람이 모두 죄인인 것처럼 묘사하는 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도쿄=윤설영 특파원 snow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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