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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남침설」은 공산권서도 인정"|39주년 맞아 전문학자가 본 전쟁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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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6·25발발 39주년을 맞아 한국동란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김학준박사(대통령사회담당보좌역·전서울대교수)와 전후세대로서 영국옥스퍼드대학에서 한국전을 연구해 학위를 받은 김계동박사 (36·연대강사) 의 대담을 통해 6·25의 책임, 남침·북침설의 진상, 분단극복방안등을 살펴본다.

<대담>

<김학준 박사 (대통령사회담당보좌역·전서울대교수)>

<김계동 박사 (연세대강사·정치학)>
▲김학준=최근 우리사회에서 6·25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좋은 연구업적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외국서적들도 번역돼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다양한 주장이 한꺼번에 쏟아지다보니 명백한 사실도 부인하는 등 왜곡된 분석도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김계동=영국에서 6년간 유학을 끝내고 작년에 돌아와보니 국내에 6·25에 대한 저서와 연구업적들이 많이 나와 놀랐습니다.
저는 6·25전후세대지만 지금 우리 대학생들이 한국전쟁에 관해 나누는 이야기를 대학시절에는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김학준=한국전쟁 논의에서 가장 큰 논란거리는 역시 「6·25가 남침이냐 북침이냐」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최근 귀국한 김교수께서 먼저 서구학계의 주장을 소개해주시죠.

<외교문서 점차공개>
▲김계동=영국의 대표적인 수정사회주의 학자인 「존·할러데이」 교수는 70년대까지만 해도 북침설을 주장했지만 최근에는 『남침·북침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 『총을 먼저 놨다고 침략의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는 등으로 사실상 남침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49년 미군철수와 50년 「애치슨」 선언으로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상에서 제외시키는 듯한 인상을 북한측에 주어 6·25를일으키게 했다는 남침유인설도 나와 있습니다.
그렇지만 최근 영미쪽에서 50년대 외교문서가 비밀분류에서 해제되면서 북침설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있다고 봅니다.
▲김학준=공산권 국가에서의 한국전쟁연구의 흐름도 크게 바뀌고 있습니다. 50년대만 하더라도 공산권에서는 북침설이 상투적 주장이었지요. 60년대에 접어들면서 소련의 「블라디미르·코미로프」 교수같은 이는 『1950년 한반도에서 군사 충돌이 발생했다』고 표현하는등 50년대의 「미제의 북침전쟁」이라는 주장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습니다.
6·25당시 중국외교부 소련·동구국장을 지낸 오수권도 외교회고록에서 『조선반도에 군사충돌이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남침사실을 알기 때문에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한것으로 봅니다. ▲김계동=미국학계에서는 6·25당시의 외교문서가 공개되면서 한국전쟁에 관한 관심이 부쩍 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영국은 미국과의 역학관계선상에서 영국의 한국전쟁에 대한 영향력문제에 관심을 보이면서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분석들을 만들어 당시의 동서냉전 시발을 조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김학준=미국에서 70년대말부터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업적이 많이 나온 것은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60년대 말부터 70년대초까지 미국대학가를 풍미했던 반전사상 때문이라고 볼수도 있습니다.
당시 미국대학생들은 『민족해방전쟁인 베트남전쟁에 왜 미국이 끼어들어 피를 흘리느냐』하는 저항의식을 갖고 있었고 이런 시각에서 2차대전 직후 미국의 아시아국가에 대한 개입전쟁의 원형으로서 한국전쟁을 연구하게 된 것이지요.
이때문에 7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출판된 서적들은 한국전쟁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해 비판적인 것이 많습니다.
▲김계동=또다른 측면으로는 한국이 경제성장등으로 국제사회에 부각되면서 한국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6·25를 집중연구하게된 것이 아닌가도 생각할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로 88올림픽 직전영국의 TV방송들이 한국을 소개하는 특집을 만들면서 으레 6·25를 다루는 데서부터 시작하더군요.

<「미의 대리전」주장>
▲김학준=외국의 한국전쟁에 대한 관심은 그 정도 해둡시다. 그런데 국내에서 왜 뒤늦게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열기가 뜨거워지는가는 한국전쟁 자체에 대한 관심이라기 보다는 우리 현대사애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재야운동권과 학계에서 논란이 많은 「누가 왜 한국전쟁을 시작했나」 하는 6·25발발 책임문제로 넘어가죠.
▲김계동=운동권 학생들과 재야에서는 한국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며 2차대전직후 미제의 세계질서 재편구도에 따라 일어났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미국이 소련의 팽창을 막기위해 한국을 앞세워 소련의 영향력 아래있던 북한을 침공했다는 것이지요.
▲김학준=한마디로 6·25는 민족해방전쟁이요, 미국에 의한 대리전쟁이라는 주장입니다.
▲김계동=그렇습니다. 2차대전 이전 상태로 환원돼야 한다는 미국의 논리에 따라 남한이 북침했다는 것으로 북한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남한에서 옹진반도를 먼저 공격하고 북한이 반격할때 일부러 계속 밀려 국제여론을 환기시킨 다음 북한과 만주지역까지 점령하려던 것이 미국의 계획이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정도입니다.
▲김학준=그러나 남침설은 이제 공산권에서도 부인하지 않는 사실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남침이라면 누구의 책임으로 보아야 합니까.
▲김계동=「로버트·시먼스」같은 학자는 소련이 50년8월1일부터 UN안전보장이사회의 의장국으로 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직후인 8월초 남침을 권유했다고 주장합니다.
또 중국도 내전이 끝난지 얼마 안돼 북한의 6월 남침은 소련과 중국의 생각보다 빨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김학준=이른바 소련무지설 또는 소련경악설이군요. 이 주장은 6·25도발 주도권이 김일성에게 있었다는 학설로 이어집니다.
「스탈린」과 모택동이 시켜 남침한 것이 아니라 김일성이 남침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으며 개전날짜조차 소중에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요.
▲김계동=요는 6·25가 김일성 단독작품이냐 「스탈린」의 사주를 받았느냐가 문제의 핵심이죠.
▲김학준=당시 북한은 소련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고 볼때 최소한 소련은 6·25발발을 알고 있었다고 보는것이 타당할것 같습니다.
이것은 「흐루시초프」 전소련공산당 제1서기의 회고록 제1권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흐루시초프」는 김일성이 남침계획서를 갖고 「스탈린」을 찾아가 계획을 설명하고 미국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고 회고하고 있지요.
▲김계동=「흐루시초프」 회고록이 발간됐을때 진위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었던 걸로 알고있는데요.
▲김학준=「흐루시초프」의 육성녹음 원본을 놓고 미CIA조작설까지 나왔지만 그뒤 음성전문가들에 의해 진본임이 확인됐지요. 다만 증언내용의 신빙성이 문제가 될수 있지만 1차자료로 쓰기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김계동=최근 밝혀진 주소북한대사를 지낸 이상조의 증언도 상기해볼만 합니다.
▲김학준=이는 북한의 정권과 군의 형성과정에 깊이 개입했던 인물로 한국전쟁중 중국을 방문, 원조를 요청했을 정도로 핵심인물이지요.
이도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구상했으며 「스탈린」에게 허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제임스·머트레이」 교수는 『한국전쟁은 「스탈린」이 원했더라도 김일성이 반대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김계동=그러면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단독구상이었나를 짚고 넘어가죠.
▲김학준=한마디로 6·25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합작품이라고 봅니다.
김은 1940년이후 시베리아로 건너가 소련군의 비호아래 성장한 인물로 소련육군대위의 복장으로 북한에 들어왔다는 것은 당시 소련점령군 수뇌들이 인정한 사실입니다.
이에비해 박은 일제치하에서 공산주의운동을 하다가 해방후 서울을 중심으로 남노당을 결성하는등 남한에 지지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북한으로 도피한 박헌영은 세력만회를 위해 김일성에게 전쟁을 부추겼고 남침하면 지하의 남노당원 20만명이 호응, 봉기할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김일성·박헌영합작>
▲김계동=국내기반이 없던 김일성과 남쪽에 기반을 둔 박헌영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는 말씀이군요.
▲김학준=그렇지요. 김일성은 48, 49년 북한에 대풍이 들어 군량미 축적이 가능했던데다 49년에는 몇개의 국군부대들이 집단 월북하는등의 징후가 나타나자 쉽사리 전쟁을 이길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특히 49년11월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데 크게 고무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북한의 신문·방송은 자신들을 중국에, 남한을 대만에 비유하는 보도를 자주 내보냈습니다.

<동복·후퇴준비안해>
더구나 49년6월30일 미군이 완전 철수했고 대한경제원조를 둘러싸고 미의회에서 반대여론이 높았으며 「애치슨」 미국무장관이 한국을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했다고 발언한 것등이 김일성에게 승리를 확신케하는 동기가 됐습니다. 미국의 개입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오판이었습니다.
「흐루시초프」 회고록에도 김은 「스탈린」이 『승리에 자신있느냐』고 물었을때 『풍선에 칼을 대면 터지듯 승리는 확실하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돼있습니다. 이상조도 회고록에서 김은 승리를 확신한 나머지 후퇴작전을 세워놓지 않았으며 동복도 준비하지 않은채 전쟁을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김계동=6·25가 김일성과 박헌영의 동상이몽에서 비롯됐다는데는 동감입니다.
그러나 저는 김일성이 6·25를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확대된 분쟁 또는 월남식의 게릴라전 발생 가능성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김학준=일리있는 말씀입니다.
▲김계동=김일성이 동복을 준비하지 않았다거나 후퇴전략을 세우지 않았다는것은 거꾸로 김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기보다는 서울지역을 점령한뒤 유리한 고지에서 남한과 협상하려 했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애틀리」 당시 영국수상이 하원에서 이런 요지의 발언을 한적이 있고 정일권 당시 3군사령관도 회고록에서 인민군이 서울점령후 3일 동안 공격을 중지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김학준=좋은 지적입니다. 「조이스·클코」 「개브리엘·콜코」부부학자의 주장이 그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45년12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회의」에서 북한을 민주기지화해서 남한으로 확대하자는 이른바 「민주기지노선」을 주창한 것으로 볼때 김의 목표는 적화통일이었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또 48년9월9일 공산정권수립을 선포하면서 「국토의 완정」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헌법에 수도를 서울로 못박아 완전통일의 의도를 드러냈지요.
전쟁중이던 50년7월17일 이탈리아 공산당기관지 위마니테와의 인터뷰에서 『미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이미 끝났고 통일은 성취됐을것』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서울점령이 목표였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습니다.
서울 점령후 3일간 공격을 중지한 것은 박헌영의 남노당세력이 봉기하기를 기다렸던 때문으로 볼수도 있습니다.
▲김계동=다시 국내에서 북침설이 새삼스럽게 거론되는 문제를 얘기해보죠. 요약하면 일본이 물러간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점령군이며, 북한에 들어간 소련군은 해방군이었다는 재야·학생들의 인식이 북침설의 근거가 되는것으로 봅니다.
분단의 책임, 민주화를 막고 독재정권을 지원하는데 대한 반감이 반미로 이어져 이런 주장까지 나온 것으로 볼수있겠지요.
▲김학준=수정사회주의의 대가 「브루스·커밍스」나 「존·할러데이」도 이제는 북침을 주장하지 않으며 공산주의 국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30년이 넘도록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손대지 않았습니다. 6·25를 판도라의 상자처럼 최급, 그동안 뚜껑을 여는 것을 금기시 했지요. 그러다가 최근에야 상자가 열리면서 북침설 또는 남침유인설등 각종세들이 여과나 검증없이 분출되고 있습니다.

<각종설 일시에분출>
▲김계동=반미감정에 기초, 현체제를 부인하려는 사고에 피상적으로 연결시키려는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김학준=이제 6·25가 남긴 유산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6·25의 가장 큰 피해자는 한민족이었지요. 6명중 1명꼴로 죽거나 다쳤으며 세계역사상 민간인 피해자가 가장 많았다는데 그 비참성이 있습니다.
보다 심각한 것은 이런 인적·물적 피해가 아니라 남북간에 뿌리깊은 불신과 증오심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남· 북한은 한 형제이지만 「카인」과 「아벨」같은 형제지요.
▲김계동=또다른 유산은 남·북한지도층이 「무력통일은 주변강대국의 개입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하게 됐지요.
▲김학준=북한은 분단50주년이 되는 오는 95년까지 분단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분단체제를 평화적으로 극복, 오는 95년은 관계가 보다 개선된 상태에서 맞을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김계동=분단극복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돼야할 과제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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