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의 시대는 계속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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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창호 9단이 요새는 신예들에게도 잘 진다. 턱없는 실수도 한다. 그러나 우승컵이 걸린 결승전이 되면 이창호는 달라진다.

이창호 9단이 26, 27일 이틀간 바둑TV에서 벌어진 3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결승전에서 박정상 6단을 2대0으로 완파하고 우승컵을 차지했다. 생애 통산 130번째 우승이다. 불가능의 기록으로 꼽히는 조훈현 9단의 157회 우승에 27회를 남겨둔 수치다. 올해는 국수전, 십단전에 이어 세 번째 우승이다.

백을 쥔 26일의 첫판은 아슬아슬한 반집승이었다. 내용 면에선 이창호 쪽이 더 많은 위기를 맞이했으나 박정상 6단이 긴장한 나머지 판단착오를 범하는 바람에 어렵게 승리를 엮어냈다. 그러나 27일의 2국에서 이창호 9단은 단 한번도 기회를 주지 않고 완승하는 저력을 보여 주었다. 이창호 9단이 과거처럼 무적은 아닐지 모르지만 이창호 시대는 아직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대국 전에 프로들은 "아무리 이창호 9단이라도 이번 승부는 자신할 수 없다. 박정상 6단이 최고조의 컨디션인 데다 전자랜드배는 TV 속기이기 때문에 나이가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이변 가능성을 점치곤 했다. 이창호 9단은 최근 물가정보배에서 최원용 4단에게 완패했고 KB한국리그에서도 원성진 7단에게 지는 등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줬다. 모두 TV 속기였다.

그러나 이창호는 23일 KT배 왕위전 도전기 첫판에서 랭킹 11위의 이영구 5단을 격파한 데 이어 불과 나흘만에 랭킹 7위의 박정상을 꺾고 우승컵을 차지함으로써 3시간 짜리든 1분 속기든 가리지 않는 '랭킹 1위'의 힘을 보여줬다.

이창호 9단은 14세 때인 1989년에 첫 우승컵을 따냈고(표 참조) 17세 때인 92년부터 전성기에 접어들었다. 20세 무렵인 95, 96년엔 한 해 13회 우승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92년부터 99년까지 8년간 무려 83회를 우승함으로써 연평균 우승 횟수가 10회를 넘는다. 이때가 말하자면 이창호 9단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다.

슬럼프 조짐을 보였던 2000년엔 불과 3회, 2001년엔 다시 분발해 8회로 올라갔다. 하나 전체적으로는 25세 이후 조금씩 그래프가 내려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고 만30세였던 지난해는 4회 우승에 머물렀다. 올해는 현재 3회 우승을 거뒀지만 모두 국내대회고 국제대회는 부진한 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창호 9단이 국제무대에서 부진하자 중국 우승이 부쩍 늘어났다는 것이다. 지난 10여 년에 걸친 한국 바둑의 세계 제패가 태반이 이창호 덕분이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세계바둑이 이창호 9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창호 9단이 분명 전성기를 지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어느 정도 파워를 유지하느냐는 곧 세계바둑의 판도와 직결되기에 숨죽여 그를 지켜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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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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