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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메멘토’ 리더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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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정치팀 차장

김승현 정치팀 차장

지금까지 이런 축사는 없었다. 이것은 축하인가 저주인가.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45년 지기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에게 쓴 글을 보고 천만 영화‘극한직업’의 카피가 연상됐다. 지난달 27일 당 대표에 당선된 고교동창에게 “축하 인사를 하기엔 한국 정치가 너무나 녹록지 않다”며 이 의원이 건넨 인사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였다. “너도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다.

로마 시대에 개선 장군의 뒤를 따르는 노예들이 이 말을 외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은 승자이지만 언젠가는 죽게 되니 겸손해지라”는 메시지가 담겼다. 이 의원은 “나를 통해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다부진 의지로 시작한 정치가 자기 자신을 삼켜버리는 괴물이 될 수 있다”고 충고했다. 또 ‘메멘토 모리’가 황 대표뿐만 아니라 모든 정치인에게 해당한다는 ‘사용설명서’도 덧붙였다.

허나 최근 정치권의 상황은 ‘메멘토 모리’ 이전에 ‘메멘토’를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한국에선 2001년에 개봉한 스릴러 영화 말이다. 영화 ‘메멘토’는 아내가 살해되는 끔찍한 사건으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의 이야기다. 그가 진실을 찾아가는 줄거리가 여간 혼란스러운 게 아니다. 기억이 10분 이상 지속하지않다 보니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긴다. 온몸에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을 문신으로 새기기도 한다. 그러나, 기록과 기억은 뒤섞인다. 관객들마저 인과 관계를 헷갈릴 정도로. 덕분에 감독(크리스토퍼 놀란)의 연출력은 극찬을 받았다. “기억은 색깔이나 모양을 왜곡할 수 있어.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니까”라는 명대사는 참인지 거짓인지 모를 오묘한 철학으로 남았다.

20년이 다 된 영화 속 기발함이 지금의 한국 정치 지도자들의 발언에서 재연되고 있다. 놀란 감독처럼 기억의 ‘착란’을 유발하려는 듯 놀라운 발언이 계속되고 있다. 기록과 기억이 뒤섞이는 것엔 무관심하고, 오로지 해석에만 의미를 둔 듯하다. 황 대표가 한국당 전당 대회 과정에서 ‘태블릿PC 조작 가능성’을 주장한 게 대표적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한다면서도 핵심 맥락을 부정하는 가짜뉴스를 끊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빨갱이’를 등장시킨 것도 뜨악했다. “과거의 상처를 헤집어 분열을 일으키자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5차례 빨갱이를 언급했다. 국민을 기억상실증 환자로 보는 듯한 ‘메멘토 리더십’은 정치가 자제해 주길 희망한다.

김승현 정치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