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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사진전문기자의네모세상] 순천 낙안읍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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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면

Canon EOS-1Ds MarkII 70-200mm f5.6 1/500초 Iso 200

흰머리에 은비녀 곱게 꽂은 할머니가 동네 어귀에 들어섭니다. 겨우 서너 발쯤 들어섰을까요. 개 짖는 소리가 세차게 두어 번 울리더니, 누렁이 한 마리가 쏜살같이 고샅길을 달려나옵니다. 그 멀리서 어찌 알았을까요? 제 주인의 발걸음 소리를 알아챘나 봅니다. 생김새로 보아 그리 뼈대가 있는 품종도 아닙니다. 흔히 '똥개'라 불리는 누렁이이지만 영민하기가 그지없습니다. 무엇이 그리 반가운지 꼬리를 살랑이며 펄쩍펄쩍 뛰기까지 합니다. 할머니는 "그려, 어여 가자"며 머리를 살갑게 쓰다듬습니다. 말 못하는 짐승일지라도 마치 어린 손자 대하듯 합니다.

누렁이가 앞장을 섭니다. 꼭 대여섯 걸음 앞서 걷습니다. 걸음이 편치 않은 할머니가 잠깐 쉬면 저도 멈춰서 뒤를 살핍니다. 한달음에 달려왔던 그 길을 할머니의 걸음에 맞춰 쉬엄쉬엄 돌아가는 누렁이가 기특하고 대견합니다. 서로 아껴주고 살펴주는 가족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순천 낙안읍성은 옛 정취를 그대로 담고 있는 곳입니다. 부드러운 곡선의 초가지붕, 구불구불한 고샅길, 돌담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 마주치는 모든 것이 정겹습니다. 우연히 엿보게 된 누렁이와 할머니의 일상적인 모습에서도 따스한 정이 듬뿍 묻어납니다. 의도하지 않은 채 마주친 우연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누렁이와 할머니가 고샅길을 벗어날 때까지 수십 컷을 찍었습니다. 그중 한 순간 낮게 날던 제비 한 마리가 앵글에 들어왔습니다. 사진 속에선 제비가 앞장서고 누렁이와 할머니가 그 뒤를 따릅니다. 사진은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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