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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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조선조 명종때 박수량이란 선비가 있었다. 그는 높은 벼슬을 고루 거치며 38년간 관직에 있었는데도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은 서까래가 몇 개 되지 않는 볼품없는 집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누가 청탁 같은 것을 한다면 바로 『나에게 죄를 주십시오』라는 말과 같았다.
그 박수량이 형조판서로 있을 때의 일이다. 동료 판서의 아우가 광주목사로 있으면서 부정을 저질러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의 형으로부터 박판서에게 잘 봐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그러나 박판서는 오히려 파직이라는 중죄를 그에게 내렸다. 명종은 박판서의 행적을 밀사로 하여금 은밀히 내사한 결과 그의 청백에 탄복한 나머지 박판서의 고향에 99칸 짜리 집을 지어주고 청백당이란 당호를 내렸다. 그리고 그가 죽자 백비를 세워 주었다.
백비란 비면에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않은 비석이다. 한 청렴한 관리의 일생을 기록한 비석이 청백의 이미지 그대로를 연상케하는 백비로 세워졌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우리 선인들의 청렴에 대한 이상은 이처럼 강렬했다.
『위정의 요체는 공정과 청백이요, 성가의 방도는 검약과 근면이다.』 이것은『경행록』에 나오는 말이다.
『관직을 다스림에는 공평 이상의 것이 없고, 재물에 임할 때에는 청렴 이상의 것이 없다』이것은 충자의 말이다.
『벼슬에 임하는 법도는 오직 세 가지가 있으니 청렴과 신중과 근면이다. 이 세 가지를 알면 몸가질 바를 아는 것이다.』『동몽훈』에 나오는 말이다.
『채근담』에도 좋은 말이 있다.『관직에 있는 이를 위하여 두 마디 말이 있으니 오로지 공정하면 명지가 생기고 오로지 청렴하면 위엄이 생긴다함이 그것이요, 집에 있는 이를 위하여 두 마디 말이 있으니 오로지 너그러우면 불평이 없으며 오로지 검소하면 모자람이 없다함이 그것이다.』
모두 진부한 얘기같이 들리지만 그러나 오늘의 정치인들이 경청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말이다.
머지 않아 우리 국회에도 윤리위원회가 설치될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기구에 앞서 모든 공직자는 백비의 정신을 마음속 깊이 새겨 넣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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