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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미시장 징검다리…멕시코「마킬라도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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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멕시코시티에서 티후아나로가는 비행기 옆좌석에는 20대 초반의 멕시코 청년이 앉아 있였다.
티후아나는 미국 샌디에이고와 인접한 인구 1백30만명의 멕시코 국경도시로「카터」행정부 시절 멕시코 페소화가 급격한 평가절하를 했을 때 샌디에이고는 물론 로스앤젤레스 주민들까지 몰려가 물건 사재기릍 해와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도시지만 그보다는 미국항 밀입국 루트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청바지에 흰색 반팔 와이셔츠를 입은 청년은 호리호리한 몸매에 눈이 유난히 큰 까무잡잡한 얼굴로 멕시코 어디서나 혼히 볼수 있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테니스 가방 모양의 조그만 백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백 속에는 속옷 한두벌과 세면도구가 들어있을 것이고 치약속에는 미국으로 밀입국해들어가 혹시 필요할지도 모를 비상금 1백달러짜리 한장이 숨겨져 있으리라 어렵지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5시간을 달려 티후아나 공항에 도착하니 멕시코 경찰이 앞을 가로막으며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 고 대답하자 불문곡직하고 여권을 빼앗으며 사무실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벌써 비행기 옆좌석에 있던 그 청년을 포함해 5, 6 명의 멕시코인들이 쭈그려앉아 있었다.
취재팀은 삼성전자·금성사등 이곳에 진출한 한국기업을 취재하러 왔다고 설명하고 미국비자까지 받은 사람을 어떻게 밀입국자로 몰수 있느냐고 항의했지만 조회가 끝날때까지 기다리라는 막무가내의 대답이었다. 밀입국 혐의자로 몰려 뜻밖의 봉변을 당하게 된 것이다.

<밀입국혐의 봉변>
30분여에 걸친 조회끝에 간신히 공항을 빠져 나오기는 했지만 입맛쓴 일이였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최근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던 한국인 30가구가 티후아나를 통해 미국에 밀입국하려다 적발된 일이 있어 한국인을 보는 공항직원의 눈이 곱지 않다는 것이다.
공항에서 사막과 갈은 황량한 벌판을 자동차로 10분쯤 달려가니 소니·히타치·코닥 등 세계 유수기업의 간판이 달려있는 큼직한 공장들이 잇따라 나타난다.
밀입국 대기자를 포함한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3천2백km의 미·멕시코국경지대에 수없이 설치된 보세공단지역 중 한곳에 도착한 것이다. 티후아나의 보세공단지역은 2백여개의 「마킬라도라」가 자리잡고 있는 비교적 규모가 큰 곳.
「마킬라도라」는 스페인어로 원래는 「곡식을 빻아주는 대가로 방아간 주인에게 지불하는 몫」이란 뜻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멕시코 국경지대 보세구역에 입주한 외국기업 공장들을 「마킬라도라」로 부르고 있다.
농부가 방아간에 곡물을 맡겨 탈곡을 시키듯이 멕시코가 외국기업에 공장을 맡겨 물건을 생산케한다는 뜻이다.
멕시코는 미국 국경지대의 급속한 인구증가에 따른 실엄률 해소와 외국자본유치를 통한 산업개발을 위해 65년부터 「마킬라도라 프로그램」을 추진, 현재 국경의 몇 개 보세구역에 1천2백여개의 공장이 입주, 19만명이 취업하고 있다.
이해관계가 민감한 미국으로서도 늘어나는 밀입국자를 상당수 이곳에서 흡수해줄 수 있고또한 값싼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어 만족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중에서도 특히 티후아나와 후아레스(미국텍사스주 엘파소 인접지역) 는 「마킬라도라」 의 중심지로 티후아나에는 2백3개공장 (종업원 2만여명), 후아레스에는 1백74개공장(종업원 6만5천명)이 몰려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마킬라도라」인 삼성멕시카나는 티후아나에 입주해 있다.
대지 1만5천평, 건평 3천5백평의 넓은 공장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탁아소가 눈에 띈다.
일찍 결혼을 하고 20대 초반이면 아이 한둘은 갖고 있는 멕시코 인력을 고용하려면 탁아소는 필수적이다.
공장 안은 미국 뉴저지공장에서 이전해 온 컬러TV 생산라인읕 설치하느라 분주했다.
미국공장을 축소하는 대신 이곳 공장을 확장하는 작업이었다.
『86년 12월 미국이 한국산브라운관에 대해 4·49%의 덤평예비판정을 내렸습니다. 이때문에 뉴저지공장은 60달러짜리 한국산대신 68달러짜리 미국산 브라운관을 써야했고 인건비도 시간당 8달러70센트로 올라 채산성을 맞추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멕시코 공장설립계획은 그때부터 입안되었습니다.』
멕시코는 한국산 부품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데다 인건비도 시간당 1달러30센트로 미국의 6분의1밖에 되지 않고 지리적으로 미국과 붙어있어 뉴저지공장을 대체할 대미우회수출기지로 최적의 장소였다고 홍성환과장은 설명한다.
게다가 본격적인 원화절상의 가속화로 절상비율만큼 덤핑레이트가 올라가고 종합무역법 입안이 임박해지면서 멕시코 진출계획은 좀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우리나라 기업뿐만이 아니라 일본은 이미 산요·마쓰시타·소니·히타치·도시바등 세트메이커는 물론 20여개 부품업체까지 진출해 있는 터였다.

<삼성이 처음 진출>
장소 물색을 위해 티후아나·멕시칼리(티후아나에서 동쪽으로 2백40h 떨어진 인구 80만명의 도시)·후아레스등을 검토했으나 태평양연안 항구도시로 부품수송이 용이한 티후아나를 택했다는 것. 그러나 삼성의 멕시코 공장이전은 새로운 도전과 시련을 요구한다.「우선 정부가 개발한 공단은 이미 포화상태라 호텔 및 부동산체인인 구스테만테가 개발한 「티후아나 인더스트리얼파크」에 공장터를 얻었다.
1평방피트에 68센트의 임대료를 내는 이른바 「셸터」방식이었다.
83년 3월 뉴저지공장에서 4명, 서울본사에서 2명등 6명으로 건설팀을 구성해 현지로 갔다.
공장건설기간을 6개월로 잡고 우선 컬러TV 생산라인 1개를 설치키로 했다.
공기 6개월은 한국에서 흔한 일이지만 이곳에서는 예삿일이 아닌 초스피드다.
또 일을 하면서 며칠 밤을 설치는 것이 한국에서는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 평범한 일이지만 이곳 사랍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작태」였다.
한국인은 「일벌레」가 아니라「미친 사람」들로 비쳐졌다.
그러나 업무는 멕시코 현지인들과 합동으로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그들을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대부분의 미국기업들이 업무이외에는 멕시코인과 접촉하지 않는 절연된 상태로 지내고 있지만 한국인들은 이들과 인간적인 접근을 도모했다.
그러다보니 파티에 초대되는 일이 많아졌다. 가난한 사랍들이라 팝콘과 콜라를 내놓는 조촐한 파티지만 놀기 좋아하는 멕시코인들은 밤늦도록 파티를 끝낼 줄 몰랐고 업무가 밀린 한국인들은 오밤중에 회사에 돌아와 밤을 꼬박 새우기 일쑤였다.
이렇게 해서 예정대로 6개월만인 88년9월 공장은 준공되었고 우선 1개 생산라인으로 19인치 컬러TV생산이 시작되였다.
이때부터 문제가 된것은 근로자들의 엄청난 이직률이었다.
국경지대보다 돈벌이가 좋은 미국으로 밀입국해 들어가기 위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사람이 많았다.

<이직율 높아 고민>
미국계 어느 회사는 월 이직률이 30%로 3개월이면 종업원을 완전히 물갈이할 정도였다.
삼성전자의 경우 월 이직률이 14%로 다른 회사에 비해 아주 낮은 편이지만 그래도 생산성향상에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현지공장의 경쟁력이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이에 따라 대미 우회수출기지로서의 멕시코공장은 더욱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뉴저지공장 3개 생산라인 중 1개만을 남겨 25인치이상 부가가치가 높은 컬러TV만을 생산토록 하고 나머지 생산라인은 멕시코공장으로 옮겨 중급 내지 저급품을 생산할 계획이다.
멕시코공장은 이에따라 올해 60만대 생산규모로 확대되며 종업원 수도 현재의 2백명에서 4백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또 가장 문제가 되는 이직률을 내년까지 10%로 줄이기 위해 우수사원을 서울에 연수시키고 생일파티, 조찬미팅 등 가족적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갖가지 방안을 강구중이다.
현재 멕시코에는 삼성전자이외에 금성사가 88년12월 멕시칼리에 진출, 삼성전자와 꼭같은 애로사항을 극복하며 연산40만대 규모의 공장을 가동중이고 대우전자와 선경도「마킬라도라」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기업들은 멕시코에서의 성공 가능성을 절반으로 보고 있지만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장벽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현시점메서 멕시코 이외에는 별다른 선택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멕시코 컬러TV내수시장의 절반이상을 차지한 한국의 가전 3사는 가장 귀중한 미국시장을 지키기 위해 멕시코 국경지대에서 또한차례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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