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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르고 어 다른 한·일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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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도쿄총국장

서승욱 도쿄총국장

일본인 지인에게서 아베 신조(安倍晋三)총리의 ‘털끝 발언’에 얽힌 뒷얘기를 들었다. 문제의 발언은 2016년 10월 중의원 예산위에서 나왔다. “위안부 합의에 더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죄 편지를 보낼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아베 총리는 “그럴 생각은 털 끝(만큼)도 없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위안부 합의에 대한 한국내 호감도를 급속도로 떨어뜨렸다. 2015년말 합의 이후 안그래도 미지근했던 여론이 더 싸늘해졌다.

지인의 설명은 이랬다. 외무성이 만들어준 ‘모범답안’은 “(사죄편지를)생각하고 있지 않다”였다. 그것을 아베 총리가 “털 끌도 없다”로 바꿔 말한 것이다. “생각하고 있지 않다”만으로도 화가 날 판에 털 끝만큼도 없다니, 한국인들에겐 언어 테러나 다름없었다. 우익들의 점수는 땄을지 몰라도 외교적으로는 빵점인 어휘 선택이었다.

반대로 문희상 국회의장의 블룸버그 인터뷰엔 일본인들이 아쉬움을 표시한다. 인터뷰 육성엔 아키히토 일왕(일본에선 천황)에게 “전범 주범의 아드님 아니시냐”며 사과를 촉구하는 대목이 담겼다. 일본내 일왕의 존재감은 우리 상상보다 훨씬 더 크다. 우리 국민들은 “시원하게 말 잘했다”고 여길 수 있지만, 일본인들은 다르다. 지한파 지식인들 조차 “아키히토 일왕은 전쟁에 대한 반성으로 평생을 살아왔는데, 일반인도 아니고 한·일의원연맹 회장을 지낸 분이…”라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파문이 확산되자 문 의장은 “전쟁 당시 일본 국왕의 아들이라는 뜻” "진정 어린 사과를 강조한 것”이라고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정치인이라면 험한 표현 없이도 얼마든지 진심을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란 게 ‘보통 일본인’들의 시각이다.

아베 총리의 대응도 비(非)외교적이었다. 중의원에 출석한 아베 총리는 다짜고짜 “(문 의장 발언에)정말 놀랐다. 너무나 부적절하고 극히 유감” "위안부 문제는 이미 해결이 끝났다”고 펄쩍 뛰었다. ‘할머니들의 고통을 모르지 않지만…’이란 배려가 단 한마디라도 들어갔어야 옳았다는 비판이 일본에서도 적지 않다.

반대로 지난 1월 신년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 기자와의 문답 뒤 “사실은 (질문을 했던 NHK기자가 아니라)그 뒤의 분을 지목한 것”이라고 말한 걸 놓고는 일본인들이 “굳이 안해도 될 말씀”이라며 무척 섭섭해했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른 한·일관계, 양국간에 얽힌 실타래는 말 한마디의 무게를 두려워하는 것에서부터 풀어야 할 듯 싶다. 양국이 서로 의심하듯 ‘반일’‘반한’으로 점수를 따겠다는 생각이 정말 없다면 말이다.

서승욱 도쿄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