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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플 퇴치법 만드는 영국, 손 놓은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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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성탁 런던특파원

김성탁 런던특파원

‘스타일은 무슨, 메건의 패션 감각은 빵점이다.’ ‘마클은 왕실 소속이라고 할 수 없다.’ 영국 해리 왕자의 부인 메건 마클의 인스타그램에 달린 악성 댓글이다. 동서 간인 윌리엄 왕세손의 부인 케이트 미들턴과 마클이 왕실에서 갈등 중이라는 보도가 발단이었다. 양 측 팬이 소셜미디어 등에서 막말 전쟁을 벌였다. 왕실은 결국 인터넷 기업에 악플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했다.

왕실조차 골머리를 앓는 가짜 뉴스나 유해 콘텐츠는 심각한 사회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2017년 영국에선 14살 소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소셜미디어에서 우울증과 자살 조장 자료를 아버지가 발견했다. 소셜미디어에는 자해 방법을 안내하는 영상도 노출돼 있다. 이를 따라하다 다치는 청소년이 속출하는 실정이다.

피해를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는 커지고 있다. 런던 중심가에서 만난 이민자 출신 파자나는 “인종차별주의적 악플을 볼 때마다 고통스럽다”며 “정부와 경찰, 사회복지 기관 등은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으니 인터넷에서 요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들여다보라”고 주문했다. 사무직 종사자 에밀리도 “아이들은 모든 정보를 인터넷에서 얻는데 자살을 방조하는 내용이나 익명의 사람들로부터 공격받는 상황 등은 정부가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유럽 국가들은 페이스북 등 거대 테크 기업들에 유해 콘텐츠를 자체 정화하도록 요구해왔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 성과가 없자 정화 조치를 강제하는 법안 마련에 나서고 있다. 맷 핸콕 영국 보건부 장관은 “신기술의 이점도 사회에 던지는 위험이 커지면 사라질 수 있다”며 “온라인 거대 기업들이 부적절한 콘텐츠를 삭제하지 않으면 법을 만들어 강제로 행동하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영국은 의회를 통해 운영되며, 우리는 필요한 조치를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영국 하원도 뒤질세라 위원회를 꾸려 보고서를 냈다. 온라인 기업들이 따라야 하는 윤리 규정을 만들고 독립기구가 감독하며 어길 경우 법적 대응에 착수토록 하자고 제안했다. 정부는 선거법 등 기술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법령을 정비한다. 소셜미디어 기업에 가짜 뉴스와 유해 콘텐츠 삭제를 강제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감시할 기구 운영에 필요한 예산도 해당 기업들이 내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영국 등 유럽에서 온라인 사이트의 댓글은 대부분 작성자의 소셜미디어 계정과 연동돼 있다. 내용을 올릴 때 자신의 신분을 내걸고 하는데도 문제투성이다. 한국의 포털사이트 댓글은 명색만 실명이지 실제로는 익명이나 마찬가지이고 비방과 가짜 뉴스가 횡행한다. 한국 정부와 정치권이 대책 없이 손놓고 있는 점이 더 큰 차이다.

김성탁 런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