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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개헌 논의 신중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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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헌법은 법률이 아니다. 헌법은 최고법으로서 국가체제의 근원적이고 항구적인 원리를 규정한다. 급변하는 여론과 상황논리에 부합하기 위해 자주 바뀔 수 있는 법률과 구별되는 상위의 법이다. 이런 헌법을 개정하려면 법률 개정과는 다른 차원에서 훨씬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근래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개헌 논의가 우려를 자아낸다. 과연 헌법의 본질적 성격을 고려한 신중한 논의인지, 그리고 과연 그런 신중한 논의가 가능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든다. 1987년 현행 헌법의 제정 이래 잠시 나왔다가 곧 수그러들었던 수많은 개헌 논의처럼 즉흥적 발상, 단기적 편의주의, 정파적 이해관계, 정략적 동기가 이번에도 바람직한 논의를 불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걱정이 든다. 개헌 논의가 사회 갈등을 더 심화해 논의를 꺼내지 않음보다 못할 것이란 생각은 필자의 소심함 때문일까.

물론 개헌 주장의 진정성을 부인하고 싶진 않다. 기존 틀 속에선 대선을 승리로 이끌 자신이 없는 정파가 판을 바꿔 권력을 유지하려는 꼼수라는 비판은 일단 차치하자. 그 비판이 부분적으로는 맞을지 몰라도 전체적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 심증 이상의 확증을 찾기는 힘들다. 특히 개헌 방안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학자들의 진정성은 의심할 수 없다. 개헌 주장을 무조건 정략적 음모로 치부한다면 무조건 기존 틀을 고수해 정권을 잡으려는 또 다른 정략적 행동으로 역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개헌 주장의 진정성을 받아들인다 해도 오늘날 개헌 논의는 근본적 문제점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개헌을 법률 개정처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헌법은 항구적-상대적 개념이지만-사회 규범과 규칙.기본권을 담지(擔持)한다. 따라서 시대상황적 적실성과 여론에 민감한 법률과 달리 다수결로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때그때의 상황논리를 초월할 수 있는 근본 원리에 대한 개정인 만큼 장기간 충분한 토의를 거칠 자세가 필요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인종차별적이지 않은 새 헌법을 만들기 위해 89년부터 97년까지 오랜 시간을 두고 여러 단계의 논의를 거쳤다. 그 결과 남아공 사례는 성공적 헌법 제.개정의 모범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과연 오늘날 우리나라 개헌론자 중 수년에 걸친 신중한 토의 과정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헌법도 마치 공작품을 만들듯이 쉽게 고칠 수 있다는 공학적 사고에 이끌리는 것은 아닐까. 87년 당시 우리 헌법이 졸속으로 만들어졌다고 비판하면서 만약 이번 개헌 논의도 성급히 진행하려 한다면 자기모순에 빠지는 셈이다.

헌법은 최고법인 만큼 개정하려면 각계각층의 의견이 충분히 개진되는 가운데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현 시점 우리 사회에서 개헌 방향에 대한 합의는 요원해 보인다. 권력구조뿐 아니라 국가 정체성이나 영토 관련 조항까지 개헌의 방향은커녕 그 여부에도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질 리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개헌 논의는 정파 간, 사회계층 간, 이념집단 간 갈등을 증폭할 공산이 크다. 많은 사람의 조화로운 참여보다 정치 엘리트에 의한 하향식 동원과 그에 따른 정치 대결로 이어지기 쉽다.

정말 필요하다면 헌법도 바꿀 수 있다. 헌법보다 바꾸기 어려운 부동산정책이란 표현이 헌법을 일반법률 정도로 희화(戱畵)화한 것이라면, 영구불변의 헌법이란 표현도 변할 수밖에 없는 인간사회를 무시한 것이다. 그러나 개헌 논의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성급한 논의는 오히려 정치혼란을 가중시키고 사회통합을 저해할 위험성이 있다. 어떤 개헌안도 공과가 있고 기존 것보다 낫다고 단언할 수 없다. 피상적 관찰과 자의적 감에 의존해 이것저것 일단 던져보기에 앞서 개헌 논의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었는지 냉철히 살펴보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

임성호 경희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