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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생일에나 받던 식용유, 남한선 설 선물이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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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서울 송파경찰서에서 열린 '2019년 설명절 북한이탈주민 격려 행사'에서 생계가 어려운 탈북민이 설 선물을 받고 있다. 임성빈 기자

지난달 29일 서울 송파경찰서에서 열린 '2019년 설명절 북한이탈주민 격려 행사'에서 생계가 어려운 탈북민이 설 선물을 받고 있다. 임성빈 기자

“처음 남한에 왔을 땐 경찰서가 무서웠어요. 북에 있을 때 ‘안전부’(현 인민보안성)는 공포의 대상이었거든요. 여기선 설 선물을 받네요.”

서울 송파구에 사는 정모(56)씨는 경찰서에서 식용유, 통조림 햄 등이 들어있는 설 선물세트를 받아 안으며 웃음 지었다. 정씨는 10년 전 북한을 떠나온 북한이탈주민이다. 4년 전 북한에 연락이 닿아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했는데 아들 한 명을 비롯해 부모와 형제 모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을 함께할 가족이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매년 맞이하는 명절에는 홀로 집에 남아 눈물을 닦아야 했다. 정씨는 “탈북민들에게 가장 힘들 때가 명절이에요. 저는 고향에 갈 수도 없으니 주로 혼자 보냈죠”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정씨에게 큰 힘이 된 건 남한 사회에서 보내온 따뜻한 관심이었다.

지난달 29일 서울 송파경찰서에서는 ‘2019년 설명절 북한이탈주민 격려 행사’가 열렸다. 명절마다 탈북민과 작은 선물을 나누는 이 행사는 15년 이상 이어져 왔다. 북한이탈주민이 지역사회에 정착하는 것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경찰 협력 민간단체 ‘송파경찰서 보안협력위원회’가 매년 개최하고 있다.

정씨는 “북한에는 이런 행사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김일성‧김정일 생일에나 기름, 과자, 간장, 된장 보급을 받았다. 그마저도 500g짜리 한 통씩이었다”며 “여기선 민족 명절에 선물을 받으니 마음이 뿌듯해지네요”라며 기뻐했다.

서인교 송파경찰서 보안협력위원회 위원장(오른쪽)이 송파구에 사는 탈북민에게 한과가 든 상자를 건네고 있다. 임성빈 기자

서인교 송파경찰서 보안협력위원회 위원장(오른쪽)이 송파구에 사는 탈북민에게 한과가 든 상자를 건네고 있다. 임성빈 기자

이날 행사에 참석한 100여 명의 탈북민은 선물과 함께 명절 인사를 나누며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북한 특유의 표현법이라고 한다.

2002년 남한에 정착해 청소 일을 하는 이모(59)씨는 “평소 남한 사회에서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는데 명절 때마다 잊지 않고 챙겨주니 비로소 명절 분위기를 느낀다”고 말했다. 이어 “제가 살던 황해도에선 차례상을 남한처럼 크게 차리지 않는다”며 “간소한 차례상과 없는 살림이 익숙했는데, 선물을 받으니 풍족한 명절이 된 것 같다”고 고백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탈북민 김모(45)씨는 부모와 형제 4명을 평양에 두고 내려왔다. 김씨는 “북한에선 양력설을 3일 동안 쇤다. 남한의 음력 설 연휴가 이렇게 쓸쓸할지 몰랐다”며 “고향에 돌아갈 수는 없지만 제가 사는 이 지역이 점점 집 같아진다”고 말했다.

김병수 송파경찰서장이 지난달 29일 '2019년 설명절 북한이탈주민 격려 행사'에 참석한 북한이탈주민에게 인사하고 있다. 임성빈 기자

김병수 송파경찰서장이 지난달 29일 '2019년 설명절 북한이탈주민 격려 행사'에 참석한 북한이탈주민에게 인사하고 있다. 임성빈 기자

송파서 보안협력위원회는 성금으로 북한 출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암 환자에게 치료비를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펼쳐왔다. 송파구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서인교(64)씨가 위원장을 맡고 있다. 서씨는 “목숨을 걸고 넘어온 사람들인데, 한국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아쉬웠다”며 탈북민 지원 활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를 밝혔다. 그는 “암에 걸린 탈북민에게 치료 지원금을 전달했는데 고맙다며 눈물 흘리는 모습이 가장 뭉클했다”고 전했다. 현재 90세의 한 탈북 노인과 일대일 결연을 맺고 그를 보살피고도 있다. 서씨는 “남한 사람은 남한 사람끼리, 북한 사람은 북한사람끼리만 모이지 말고 서로 간의 교류가 활성화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임성빈·이가영 기자 im.soungb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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