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백야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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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느 나라나 열차역이 붐비듯 야로슬라브역도 마찬가지였다. 선물 보따리를 들고 자신의 객차를 찾아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석별의 정올 나누는 연인들,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어린이들에서부터 꽃도 파는 신문판매점 앞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까지 여느 정거장에서나 볼 수 있는 눈에 익은 풍경들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호텔을 구하지 못해 갈 곳 없는 여행객들이 노숙하고 이들을 유혹하는 밤의 여자들이 이 사회주의 국가에도 있다했다.
역 앞 광장풍경은 여행객이 들뜨기에 충분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열차 여행을 하면서 반감되기 시작했다.
안내를 맡아 한달 가까이 줄곧 함께 지낼 「세르게이」는 외국 기자들을 안내해 시베리아지역을 몇 번 방문했지만 시베리아횡단열차를 이용한 것은 처음이라며 이번 여생이 『굉장히 지루하고 먼 여행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소련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멀리 한국에서까지 찾아왔지만 정작 소련에는 변화의 필요성과 절박성을 느끼는 사람들의 수가 많지 않아 안타깝다』고 처음부터 맥풀리는 소리를 했다. 그의 말대로 횓단 열차는 더 이상 제국러시아 시절의 화려함이나 이방인이 생각했던 것 같은 낭만에 찬 모습이 아니었다.
포터와 함께 짐을 들고 지정된 좌석이 있는 객차 앞에 가자 마gms살은 되어 보이는 여승무원은 딱딱한 표정으로 우리일행의 표를 일일이 점검한 다음에야 객차에 오르는 것을 허용했다.
열차는 식당차2량, 우편자1량, 소프트클라스라는 2인실 및 4인실의 침대차가 5량, 하드클라스라는 칸막이가 없는 침대차가 10량 포함되어 모두 18량이었다.
열차의 출발시간은 저녁 6시. 기적한번 울리지 않고 열차는 출발했다.
벌써부터 백야현상 탓인지 밤 10시가 되도록 차창 밖의 풍경이 희끄무레한 채 펼쳐졌다. 모스크바 지역을 벗어난 지 얼마지나 승무원이 「차이」소련의 홍차) 를 마시지 않겠느냐면서 장거리 여행을 위한 담요·침대시트·베개등을 가져다 주었다.
소련은 여성노동력을 각 방면에 고루 활용하고 있는데 철도의 승무원은 기관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원이 여자다.
차를 시켰더니 한 잔에 5코페이카, 그러나 그 자리에서 찻값을 받지 않고 종착지에서 내릴 때 지불한다고 일러주었다.
중간, 중간 취재목적지에서 도중 하차 했지만 24시간, 48시간을 꼬박 열차 속에 갇혀있기에는 지루한 감도 없지않았다.
그런대로 낙이라곤 매에 맞춰 식당차서 찾는 게 고작이었다.
식사는 한끼에 보통 4∼5루불어치는 먹어야 양이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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