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흔한 사랑인 듯 무심하게 그려낸 동성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미국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봤다. 충격이었다. 록키 산맥의 장쾌한 풍광 때문이 아니었다. 이토록 애절한 사랑을 또 언제 봤던가. 둘이 만나 사랑에 빠지고, 뒤돌아섰다 부둥켜안고,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20여 년간 이어진 사랑은 곱고도 순수했다. 그래서 슬펐다. 말하자면 영화는, 정통 멜로드라마였다. 사소한 차이점이 있긴 했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모두 남성이었다.

방현희(41)의 소설집 '바빌론 특급우편'(열림원)을 읽었다. 책을 집은 건 "동성애를 무심하게, 그저 사람이 사랑하는 방식으로 그려낸 한국 최초의 작가일 것"이란 해설 때문이었다. 소설은 대체로 해설과 다르지 않았다.

단편 '연애의 재발견'을 보자. 소설은 삼각관계에 있는 세 사람의 이야기다. 85㎏의 남성 디자이너 '정진', 65㎏의 19세 남성모델 '주성', 덩치가 크고 가무잡잡한 피부의 여성모델 매희가 그들이다. 삼각관계란 흔히 한 명의 이성을 사이에 둔 동성 둘의 경쟁을 가리킨다. 소설에서도 남성 둘은 갈등관계에 놓인다. 그러나 그건 매희를 차지하려는 다툼이라기 보단 둘 사이의 질투나 배신감에 가깝다. 정진의 연인인 주성이, 원래 정진의 여자였던 매희와 얽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진이 힘든 건, 매희가 바람을 피워서가 아니라 주성이 정진을 외면해서다.

소름 돋았던 대목이 있다. 정진이 사우나에서 주성을 처음 만난 장면이다. 몇 구절을 옮긴다. '엉덩이에서 다리로 이어진 곡선과 움직임이 그를 끌어당겼다. … 길고 가늘고 매끈한 몸 … 저 몸에 오직 사랑하고 복종하리라.' 일말의 머뭇거림이 없다. 정체성 혼란이나 도덕적 갈등 따위도 없다. 정상이냐 비정상이냐를 놓고 주저하지도 않는다. 사랑을 느껴 사랑에 빠졌을 뿐이다. 영화 속 카우보이의 사랑도 그러했다.

소설은 동성애를 일상의 차원에서 말한다. 성별을 공개하지 않았다면 TV 연속극처럼 뻔한 사랑타령이었을 것이다. 아니, 뻔하고 흔한 사랑, 맞다. 인류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사랑이었다. 여태 사랑을 이겨낸 존재는 없었다. 나이.가문.계급.인종.국경…, 모두 사랑에 의해 제압된 상대다. 이번에 무너진 건 성별이고.

동성애 영화를 '퀴어(queer)'영화라고 한다. '괴상한'이라고 형용한 건 비정상적이라는 가치가 전제됐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소수자의 인권문제로 접근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비슷한 맥락이다. '커밍아웃'하겠다는 게 아니다. 사회적 금기를 되묻는 것이며 문학의 의의를 따지는 것이다. 세상에 '살색'은 없다.

손민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