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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이나 연기했는데…아직 날것 뱉어가는 과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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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7호 18면

[셀럽 라운지] ‘레드’로 연극 무대 복귀한 정보석

배우 정보석은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연극 ‘레드’(1월 6일 ~2월 10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 3년 만에 재도전한다. [사진 신시컴퍼니]

배우 정보석은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연극 ‘레드’(1월 6일 ~2월 10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 3년 만에 재도전한다. [사진 신시컴퍼니]

“자식은 아버지를 몰아내야 해. 존경하지만 살해해야 하는 거야.”

세대간 갈등 그린 작품 #젊은세대에게 양보해야 되는데 #기성세대가 더 가지려해 부딪쳐 #17년간 교수로 재직 #풋풋한 감성의 아이들 매년 만나 #선배가 후배 이해해주는 것 깨달아 #다원문화복지회 대표 #다문화가정 청소년 사회 적응 도와 #야구 하고 같이 뛰니 학교 돌아가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와 조수 켄의 격렬한 논쟁으로 짜여진 연극 ‘레드’의 대사다.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의 미국 예술계, 격렬한 세대교체 요구에 직면했던 시대의 세대 간 갈등은 우리 시대 아버지와 아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연륜의 배우 정보석(56)에게도 그 갈등은 소화해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었다.

“2011년 국내 초연을 보고 작품이 너무 좋길래 제작자인 신시컴퍼니 박명성 대표에게 지나가는 말로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3년 전에 ‘누가 펑크를 냈다’며 너무 촉박하게 연락이 왔더라고요. 당시 드라마 때문에 못할 상황인데 워낙 급해 보이길래 덥석 도와주겠다 했죠. 그런데 너무 어렵더군요. 로스코의 고민을 소화할 새도 없이 앵무새처럼 대본 외워 뱉어내는 데 급급해야 했죠. 끝나면 관객 눈 피해 도망쳐 나오기 바빴어요.”

재도전을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겠어요.
“그때 트라우마가 생겨 지금까지 공연을 안 했을 정도니까요. 이번에는 일찌감치 제의를 받긴 했지만, 결정이 쉽지 않았죠. 재촉 전화가 와서 다시 대본을 읽어보면 몰랐던 부분이 조금 보이고, 근데 전화를 하려고 하면 숨이 막히고. 그런 과정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마음을 바꿨어요. 거절하려니 이번에 안 하면 영영 연극 못 할 것 같더라고요.”

연극 ‘레드’는 1958년 뉴욕 씨그램 빌딩에 문을 연 ‘포시즌 레스토랑’에 걸릴 벽화를 의뢰 받은 마크 로스코가 40여 점의 연작을 완성했다가 갑자기 계약을 파기한 사건에 주목한다. 자본의 논리에 직면한 예술가로서의 고뇌를 그리는 듯, 궁극적으로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내주어야할 이전 세대의 고뇌를 담고 있다. 방대한 분량의 대사에 예술가의 형이상학적 고민이 빼곡히 담긴 어려운 작품이지만, 국내 연극팬들에게 뜨거운 호응을 받으며 꾸준히 재공연되고 있다.

쉽지 않은 작품인데 초연 때 뭐가 그리 좋았나요.
“가장 강하게 읽혔던 게 세대교체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초연 볼 때 제가 참 애매한 나이였거든요. 후배와 선배 사이에서 배우로서의 내 자리가 애매모호한 상태였는데, 그런 고민이 있던 차에 이야기가 강렬하게 다가왔죠. 자기 일에 철저한 느낌들도 감동적이었구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나태해지고 관성에 빠져 있었는데, 이 작품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 거죠.”
소극장 2인극 도전도 처음이었잖아요.
“연기는 처음이었지만 ‘2인극 페스티벌’ 조직위원장을 5년간 했죠. 2인극은 연극하기에 가장 완벽한 형식이라 생각해요. 둘이 앉아 있으면 모든 이야기가 가능하거든요. 집안에 감춰진 이야기부터 우주 끝까지 갈 수 있죠. 누가 끼어들지 않으니 집중력도 강하고. 페스티벌하면서 보니 명작을 비롯해 어떤 테마라도 다 되더군요. 소통의 최소 단위이자 가장 밀도있는 단위랄까. 중요한 이야기를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하는 데 가장 좋은 형식인 것 같아요.”

‘2인극 페스티벌’ 조직위원장 5년간 맡아

배우 정보석은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연극 ‘레드’(1월 6일~2월 10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 3년 만에 재도전한다. 신인섭 기자

배우 정보석은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연극 ‘레드’(1월 6일~2월 10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 3년 만에 재도전한다. 신인섭 기자

그가 내민 명함엔 뜻밖에 ‘다원문화복지회 대표이사’라고 찍혀 있었다. 다문화가정의 학교 부적응 청소년들의 사회융합을 위한 복지단체를 3년 전부터 맡아 아이들과 몸으로 부딪치며 어울리고 있다. “제일 손이 못 가고 있는 아이들이잖아요. 내버려두면 결국 폭력 같은 범죄로 빠지기 쉬운데, 한 1년 관심을 쏟아주니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식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조마조마 연예인 야구단과 같이 야구도 하고, 몸으로 같이 뛰니까 좋아하더군요. 60~70%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거나 검정고시를 보는 등 길을 찾고 있어요.”

‘레드’는 자본주의와 예술의 관계도 다루고 있는데, 예술가도 결국 자기 세계를 지키기보다 돈과 명성을 쫓게 되는 걸까요.
“나는 속물이라 둘 다 필요하다 생각해요. 열심히 벌어서 잘 쓰자는 마음이고, 그래서 이런 사업도 하는 거죠. 로스코의 고민도 바로 그 지점인데, 당시 세상이 급변하던 시기에 얼마나 힘들고 아팠을까 싶어요. 이전 세대를 살아오면서 왜 사는지, 무엇으로 사는지, 삶의 진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왔다면, 거기서 벗어나 쉽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그림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에요. 포시즌 제의를 받아들여 자본주의 핵심 멤버들에게 삶에는 돈만 있는 게 아니라고 웅변하려 했던 거죠. ‘삶이 표피적으로 흐르니 내 작품 통해서 진짜를 돌아보라’는 건데, 저도 그런 갈증 때문에 연극을 해요. 연기가 생활의 수단이 되버리는 것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연극하면서 생각도 많이 하고 고민하는 거죠. 나 스스로라도 삶에 의미를 찾아야 허망하지 않을 테니까.”
‘꼰대’와 청년간의 논쟁이 마치 우리 사회 세대 간 분열 양상을 보는 듯한데, 켄 역의 후배들과 갈등은 없나요.
“저는 운 좋게도 30대 후반에 교수가 되어 스무 살 아이들을 17년간 봤어요. 자칫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울 때 풋풋한 감성 지닌 아이들을 매년 만나면서, 선배가 후배를 이해해줘야 한다는 걸 깨달았죠. 우리가 젊었을 때를 한 번만 돌이켜보면 답이 나오잖아요. 철저하게 기성 세대와는 반대로 살았으니까. 의견 대립이 있다면 선배가 맞춰줘야죠. 우리는 많은 걸 겪었고, 그걸 수용할 여유가 있잖아요.”
아버지와 아들간의 격렬한 논쟁으로 볼 수도 있는데.
“저도 제 아들에게는 그러지 못해 안타까워요. 자의식 강한 둘째와 많이 부딪쳤죠. 제가 지켜봐 줬다면 자기 삶을 더 잘 만들었을 텐데, 저랑 싸우고 견제하느라 소중한 시간을 다 허비한 것 같아 미안하죠. 자기 세대 문화가 있는데 내 세대로 끌어당기려 하니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을까. 시대가 다른데 ‘우리 때 이랬다’ 얘기하는 것도 촌스러운 거죠.”

연극은 표피적으로 흐르는 삶의 갈증 해소

“자식은 아버지를 몰아내야” 한다는 로스코도 스스로는 큐비즘을 뭉개버렸다고 자부하면서 정작 팝아트의 득세는 인정하지 않잖아요.
“우리 세대가 우리와 다른 색깔을 인정 못하고 용납 못하는 데서 오는 부딪침 아닌가 싶어요. 마지막에는 켄에게 ‘밖으로 나가서 네 삶을 만들라’고 하잖아요. 네 주장 펼치고, 사람들이 널 보게 만들고, 뭔가 새로운 걸 만들어 보라며 끝나는데, 그게 핵심 아닌가 싶어요. 젊은 세대는 당연히 오는 거니, 우리가 놔줘야 되는데 자꾸 우리가 더 가지려 해서 갈등이 생기는 거죠. 우리가 양보해야지 젊은 세대에게 양보하라고 하면 그 아이들은 뭘 갖고 살까요.”

정보석은 1986년 드라마 ‘백마고지’로 데뷔했다. 30여 년간 수많은 역할을 맡았지만 마크 로스코만큼 힘든 배역이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웬만한 역은 다 재미있는데, 3년 전엔 재미를 한순간도 못 느꼈어요. 고통스럽기만 했죠. 로스코의 고민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이젠 내 식으로는 알겠고, 적어도 내 공연에선 어떤 고민을 보여줘야겠다는 게 생겼어요.”

연기 인생에 위기도 있었겠죠.
“40대 초반 어느 12월 31일에 아이들 태우고 놀러가는데, 차가 막혀 12시간 동안 갇혀있다가 차 안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듣게 됐어요. 그 종소리가 쿵쿵 머리를 치면서 갑자기 책임감이 밀려왔죠. 철이 들었달까. 가장으로서의 무게가 느껴지니 돈벌이 수단으로 연기를 하게 되더군요. 그 당시 주인공만 하던 때인데, 지치고 쉬고 싶은데도 의무감에 일을 했어요. 매일이 지옥 같았는데, 아이러니하게 히트작은 많이 나왔죠. 운 좋게 ‘보고 또 보고’ 같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7, 8년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죠. 그렇게 부모 반대 무릅쓰고 의자로 두들겨 맞으며 시작한 일인데,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싶었죠. 연기 자체에 감사하고 즐기게 되니, 누구와의 비교 같은 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더군요. 이젠 어떤 역할이든 사회에 기여가 되는 작품을 하려고 의식하면서 해요. 우리가 하는 일도 예술로 봐준다면 거기에 대한 책임이 아닌가 싶고.”
로스코의 두려움은 ‘언젠가 블랙이 레드를 삼켜버리는 것’인데, 배우 정보석은 어떤가요.
“지금 내겐 ‘블랙’이 없어요. 아직도 레드의 다양성을 개발하는 단계일 뿐이니까. 제 연기는 아직 세련되지 못하고 날것처럼 뱉어내는 과정이라, 어렴풋이 ‘이런 게 연기일까’라는 느낌이 생기려는 정도거든요. 배우로서 정말 멀었죠. 아직 ‘블랙’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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