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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엔 꼭 퇴사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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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윤정민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윤정민 콘텐트팀 기자

윤정민 콘텐트팀 기자

송년회를 핑계로 친구들과 모여 앉았다. 매번 그렇듯 실없는 얘기를 하며 한잔씩 비워나갔다. 적잖이 술기운이 올랐을 때쯤, 한 친구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나 사표 냈다. 명절까지만 막자고 해서 일단 버티는데, 새해엔 마음 굳게 먹고 어떻게든 그만둘 거다.”

금연이나 다이어트 같은 흔한 새해 다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충격적인 계획도 아니었다. 우리 모두 그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회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자주 괴로워했다. 업무 능력이 지나치게 떨어지거나 성격이 모나서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무난한 성격이 대기업의 영업관리 일과는 맞지 않았다. 그는 대체로 시키는 모든 일을 묵묵히 해냈고, 불평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자 성과가 나기 힘든 궂은일이 그에게 몰렸다.

게다가 최근엔 인사평가에서 ‘C’를 주겠단 말까지 들었다. 그의 상사는 “김 대리는 내년에 본사로 가고 싶어하고, 이 대리는 해외지사 지원한다고 하고, 박 대리는 곧 결혼인데 C를 줄 순 없잖아. 너 열심히 잘한 건 내가 알지만, 이번에만 좀 희생하자” 같은 뻔뻔한 이유를 들이밀었다.

이런 사정을 훤히 알고 있던 터라 우리 반응도 심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들 “잘했다. 네가 호구냐. 당장 때려치워라”고 했다. 퇴사 이후에 대한 걱정보다 ‘지금보단 낫겠지’란 생각이 컸다.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진 고백은 송년회 분위기를 조금 더 무겁게 만들었다. 그의 선언은 시작일 뿐이었다. 힘들게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3년째 일하고 있는 또 다른 친구가 “사실 나도 비슷해. 그만두고 다른 일 알아볼까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번엔 옆에 있던 또 다른 친구가 말을 받았다. “아, 뭐야. 나도 사실 여름에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 치려고 했는데. 네가 그러면 어쩌냐”고 했다. 이어서 또 다른 친구가 나섰다. “그냥 너도 교육대학원이나 알아봐. 사실 난 벌써 알아보고 있다”.

결국 우리 송년회는 ‘퇴사 선언’의 장이 됐다. 그날 모인 우리 10명 중 절반이 퇴사를 새해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쯤 되니 우리가 너무 나약한 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찾아보니 2017년에만 전체 직장인 2명 중 1명이 퇴사를 경험했다고 한다. 취업난이 이렇게 심각한데도 말이다. 진짜 취업률만 올리면 되는 걸까. 오래 정붙이고 다닐만한 직장을 만드는 건 언제까지고 뒷전에 미뤄둬도 되는 일일까. 퇴사한 내 친구들은 다른 일을 찾을 수 있을까. 그 뒤에 맞게 될 새해엔 조금이나마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윤정민 콘텐트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