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잿더미 속엔 막걸리병과 약통이…크리스마스의 국일고시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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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화재로 7명이 숨진 국일고시원에 남아 있는 잿더미에 덮인 빈 막걸리병. 기자가 손으로 벽을 훔치자 재 가루가 묻어나왔다. 김정연 기자

지난달 화재로 7명이 숨진 국일고시원에 남아 있는 잿더미에 덮인 빈 막걸리병. 기자가 손으로 벽을 훔치자 재 가루가 묻어나왔다. 김정연 기자

크리스마스인 25일, 지난달 화재로 7명이 숨진 종로구 국일고시원을 찾았다. 건물 앞에 쳐졌던 폴리스라인은 모두 걷힌 상태였다. 입구에는 시민들이 설치한 추모공간과, '집은 인권이다!'라고 쓰인 팻말이 붙어 있었다. 유리가 깨지고 검게 탄 창틀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다.

종로구 국일고시원 입구. 김정연 기자

종로구 국일고시원 입구. 김정연 기자

건물 안은 조용했다. 2층까지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이어지던 흰 벽은, 2층과 3층 사이에서 검게 변했다. 손으로 닦아내니 검댕이 묻어나왔다. 3층의 불로 생긴 검댕이 위로 번진 흔적이었다. 한 달이 넘는 시간동안 이슬이 맺혀 흘러내린 자국도 남았다.

2층과 3층 사이 복도. 흰 벽이 검게 변했다. 김정연 기자

2층과 3층 사이 복도. 흰 벽이 검게 변했다. 김정연 기자

국일고시원 3층 복도. 재가 그대로 남아있고, 폴리스라인이 걷혀 있다.김정연 기자

국일고시원 3층 복도. 재가 그대로 남아있고, 폴리스라인이 걷혀 있다.김정연 기자

2층 고시원은 철문이 닫혀있었고, 3층 화재현장은 쇠사슬로 문이 묶여있었다. 2층 철문이 열리긴 했지만 안쪽 문이 잠겨 있고, 내부는 불이 꺼진 채 고요했다. 2~4층을 쓰던 국일고시원에는 현재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 인터넷으로 '국일고시원'을 검색하니 주소가 지워진 채 뜨지 않았다.

2층과 3층 사이 있던 신발장. 이곳은 불이 직접적으로 번지진 않아, 신발 등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김정연 기자

2층과 3층 사이 있던 신발장. 이곳은 불이 직접적으로 번지진 않아, 신발 등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김정연 기자

잿더미 속 남아 있는 물품들 중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건 신발, 막걸리병, 약통, 편의점 도시락통, 라면봉지 등이 전부였다. 계단에 남겨진 목장갑 하나는 화재 당시 살고 있던 입주자들 중 다수가 건설현장 등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갔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3층과 4층 사이에는 좁은 방에 미처 두지 못한 짐들을 담은 트렁크와 가방들이 놓여 있었고, 고시원 소유로 추정되는 여분의 매트리스도 쌓여 있었다. 하나같이 검게 재를 뒤집어쓴 채였다.

국일고시원 계단에 남아있던 빈 막걸리통. 김정연 기자

국일고시원 계단에 남아있던 빈 막걸리통. 김정연 기자

국일고시원 잿더미 속 약통. 김정연 기자

국일고시원 잿더미 속 약통. 김정연 기자

국일고시원 잿더미 속 남아있던 목장갑. 김정연 기자

국일고시원 잿더미 속 남아있던 목장갑. 김정연 기자

계단에 남아있던 빈 편의점 도시락통과 라면봉지. 김정연 기자

계단에 남아있던 빈 편의점 도시락통과 라면봉지. 김정연 기자

3층과 4층 사이 복도에 놓인 짐들. 김정연 기자

3층과 4층 사이 복도에 놓인 짐들. 김정연 기자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2층 고시원 입구에 붙어있는 '고시원 화재예방수칙' 안내판이 이질적으로 보였다. 수칙 중 '화재발생의 원인이 되는 문어발식 플러그 접속을 금지하시고, 특히 각 실의 개인 전열기구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 화재 원인은 301호의 전열기구로 밝혀진 바 있다.

국일고시원 2층 입구에 붙어 있던 화재예방수칙. 김정연 기자

국일고시원 2층 입구에 붙어 있던 화재예방수칙. 김정연 기자

국일고시원 현장에 놓인 추모 꽃다발들. 김정연 기자

국일고시원 현장에 놓인 추모 꽃다발들. 김정연 기자

다시 1층으로 내려오는 길, 추모 테이블에 놓인 꽃들 사이에 자동소화기가 하나 놓여 있었다. 경보기에는 전국세입자협회가 쓴 '이것만 있었어도... 18000원에 생명이'라는 문구가 빨간 매직으로 적혀 있었다.

25일 국일고시원 앞에서 열린 추모예배. 김정연 기자

25일 국일고시원 앞에서 열린 추모예배. 김정연 기자

예배하는 사람들 뒤로는 소화기가 잔뜩 쌓여있었다. 바로 앞에 위치한 소방 기구 가게에서 판매하는 소화기들이다. 김정연 기자

예배하는 사람들 뒤로는 소화기가 잔뜩 쌓여있었다. 바로 앞에 위치한 소방 기구 가게에서 판매하는 소화기들이다. 김정연 기자

25일 오전 11시 국일고시원 앞에서는 대한성공회 나눔의집 협의회가 주최한 '국일고시원 화재 피해자 추모 성탄 예배'가 열렸다. 서울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의 여재훈 신부는 "스스로의 잘못이 아니라 주변 상황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이들이 우연이 아닌 필연에 의해 저 곳으로 내몰리지 않았나 싶다"며 "어찌보면 사회적 타살이라 불릴 정도로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살아가는 이웃들이 많다"고 했다. 체감기온 영하의 쌀쌀한 날씨에도 100여명이 거리에 앉아 희생자들을 기렸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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