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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원, 2000만원…비슷한 성추행에 합의금 20배 차이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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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현재의 합의 관행에서 성범죄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처벌'과 '합의금' 중에 택일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일러스트= 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현재의 합의 관행에서 성범죄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처벌'과 '합의금' 중에 택일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일러스트= 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다섯 명의 변호사에게 성범죄 사건 합의금의 액수를 물었다. 이들의 첫 반응은 "정말로 천차만별인데요"였다. 다만 검찰단계에서 형사조정을 통해 합의를 하거나 민사 손해배상으로 갔을 경우 법원에서 인정해주는 대략의 범위는 있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추행의 경우 200만~400만원, 더 무거운 추행의 경우 500만원 이상, 강간·준강간의 경우 1000만~5000만원 정도다.

성범죄 합의 딜레마<중> #가해자 지위·재산에 따라 갈려 #판사 “돈으로 형량 사는 면 있다” #합의금은 성폭력에 대한 위자료 #피해자들 당당하게 받아야

이와 다른 금액을 받는 경우도 많다. 다수의 성범죄 피고인들을 변호했던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피해 정도가 비슷한 강제추행 사건에서 한쪽은 100만원에, 다른 쪽은 2000만원에 합의가 이루어지는 등 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술에 약을 타고 범죄장면을 촬영하는 등 죄질이 나쁜 준강간사건에선 1억원 가까운 돈이 합의금으로 지급됐다. 성범죄피해자 국선변호를 전담으로 하고 있는 법률구조공단 변주은 변호사는 "합의금은 가해자의 경제상황이나 피해자의 마음 등을 고려해 다양하게 책정된다"면서 "사건마다 상황이 달라 획일적 기준을 갖기 어렵다"고 말했다.

일본의 경우 성범죄 합의금의 대략적인 시세를 각 법률사무소 홈페이지 등을 통해 공개하고 있다. [형사사건 변호사 카탈로고]

일본의 경우 성범죄 합의금의 대략적인 시세를 각 법률사무소 홈페이지 등을 통해 공개하고 있다. [형사사건 변호사 카탈로고]

합의금 산출엔 가해자의 경제 사정, 가해자의 사회적 지위, 피해자의 경제 사정이 변수로 작용한다. 가해자가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일수록, 가해자가 경제적 능력이 클수록 금액은 올라간다. 변 변호사는 "공무원·교사·연예인 등 사건이 알려지면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거액을 제시한다"고 말했다. 비전담 피해자 국선변호사인 서혜진 변호사는 "가장 합의하기 어려운 경우가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경제적 능력이 있는 경우"라고 설명했다. 피해자들은 자신의 연봉을 기준으로 합의 금액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가해자가 이를 지불할 능력이 없는 경우 합의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도 자신의 박사논문에서 "가해자가 경제사정이 어려운 경우, 비록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인정하고 진지한 반성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런 태도가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고 밝혔다.

때로 합의금은 '가해자의 돈'이 아니라 '가해자 가족의 돈'에서 나온다. 성범죄자의 9.7%는 19세 미만의 소년이고, 성인 성폭력 범죄자의 42.9%는 35세 이하의 청년이다(대검찰청 범죄분석, 2016년 기준). 서울의 한 성범죄전담재판부 판사는 "미성년자·대학생·사회 초년생 대부분 돈이 없는데 결국 피해자에게 주는 합의금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가족, 특히 부모의 후견적인 돈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돈이면 다 되는구나" 싶어도…합의금은 여전히 '필요한 돈'

결국 다른 형사합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성범죄 사건에서도 '돈 있는 가해자가 유리하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서울의 한 성범죄전담재판부 판사는 "피해자와의 합의를 통해 양형을 '사는' 측면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수년 동안 성범죄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합의와 합의금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지켜봐 온 한 변호사는 "때로 '돈이면 다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단면 같다"고 털어놨다.

합의금은 대부분 가해자가 자신의 득실을 따져 계산된 금액이 피해자에게 제시된다. 사진은 본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중앙포토]

합의금은 대부분 가해자가 자신의 득실을 따져 계산된 금액이 피해자에게 제시된다. 사진은 본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중앙포토]

취재과정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그래도 합의는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피해 회복에 돈이 필요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자의 50.9%는 20대와 30대의 젊은 여성으로(대검찰청 범죄분석, 2016년 기준) 정신과 치료 등 고비용을 스스로 부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장 부연구위원은 "특히 성폭력사실에 대해 부모 등 가족에게 숨기는 경우 그 비용의 부담 때문에 형사합의를 고려하게 된다"고 했다. 사건이 벌어진 장소가 집이라면 이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합의를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피해 후유증이 클수록, 이를 회복하는 데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피해자들은 형사처벌보다 형사합의를 선택한다"는 것이 장 부연구위원의 말이다. 국가에서 금전적 지원을 해주기도 하지만, 여성가족부 자료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자 1인당 평균 의료비 지원액은 2010년 기준 14만 2080원이다.

합의금 지급은 그 자체로 처벌로서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가해자가 스스로 모아온 돈이든, 가족들로부터 나온 돈이든 그에게 금전적인 부담을 지운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처벌이다. "합의금이 피해자의 피해 회복에 어떤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에 변 변호사는 "피해자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가해자로부터 인정받고, 가해자가 재산의 일부를 내어놓음으로서 처벌적인 기능을 한다"고 말했다. 서 변호사는 "돈을 받기 싫다는 피해자들도 많지만, 그럴 때마다 '원상 회복이 불가능한 이상, 금전 배상이 원칙이다'고 말씀드린다"고 말했다.

고민 끝 합의 결심해도…나서면 의심받고, 받고서도 불편해

문제는 피해자들은 배상에 당당하게 나설 수 없단 점이다. 합의를 제안하고 금액을 제시하는 건 대개 가해자다. 성범죄 전문 박원경 변호사는『성범죄 사건 사건별 시간별 대응전략』이란 저서에서 가해자들에게 "합의서는 주도적으로 작성해 피해자 측과 의견을 교환하는 게 좋다. 작성을 주도한 측에 유리하게 작성할 수 있으며, 피해자의 무리한 요구에 적절히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조언한다. 이에 비해 피해자는 수동적 태도를 요구받는다. 장 부연구위원은 "수동성을 유지하지 않고 형사합의를 적극적으로 제안할 때 사법기관은 강간당했다는 여성의 진술 자체에 대해 의심한다"고 밝혔다

합의금을 받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꽃뱀'으로 보는 시선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피해자는 합의를 하고도 그 돈이 불편하다. 피해자 변호사들은 피해자들로부터 "더러운 돈을 쓰고 싶지 않다"거나 "이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고 한다. 변 변호사는 "이 돈은 피해에 대한 정당한 보전이고, 불법행위에 대한 위자료이며, 민사소송을 통해서도 청구할 수 있다. 이 돈을 다른 의미로 해석할 필요가 없고, 정당하게 받으신 거니 필요한 데 쓰시면 된다"고 조언한다고 한다.

위에 언급된 성범죄전담재판부 판사는 이런 해석을 내놨다. "우리 사회에 돈을 정당하게 벌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자꾸 돈을 '천하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그리고 여전히 합의를 무시하는 시선 속에는 '정조관념'이 들어 있죠. '신성하고 고귀한 성'을 '천한 돈'과 어떻게 맞바꿨냐는 거죠. 그런데 이게 어떻게 맞바꾼 게 되나요. 형사합의의 의미를 사회적으로 다시 해석해줄 필요가 있어요. 피해자들이 합의 여부나 금액을 더 당당하게 선택하고 요구할 수 있도록요."

문현경 기자 moon.hk@joo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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