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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다 살아난 뒤 무대에 더 빠져, 대충하는 애들 보면 화 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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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호 24면

[셀럽 라운지] 뮤지컬 ‘광화문 연가’ 주연 안재욱

뮤지컬 ‘광화문 연가’는 중장년층에게 선물같은 무대다. ‘죽음을 앞둔 한 남자의 마지막 1분’이라는 시간 동안 첫사랑부터 학생운동, 군입대, 결혼, 이별과 재회, 닥쳐올 죽음까지 온갖 기억을 소환하며 인생을 반추하게 한다. 이 추억 여행의 BGM은 고 이영훈 작곡가의 ‘국민 가요’들이고, 여행의 안내자는 우리와 함께 나이를 먹고 있는 배우 안재욱(47)이다. 1990년대 ‘한류 1호’ 청춘스타로서의 과거를 뒤로 하고 무대를 지키고 있는 안재욱의 인생도 이 추억 여행의 여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주인공과 같은 경험 #여행 중 지주막하출혈로 죽을 고비 #비행기가 추락했는데 살아난 셈 #열정 넘친 대학시절 #신동엽·류승룡·황정민·정재영 등 #‘또라이’ 다모여 뭘 해도 재미 #‘한류 1호’ 청춘스타 #화려한 삶은 잘 안 맞아 활동 자제 #재주 있다면 더 많이 보여드릴 것 #중년 이후의 인생 #한 발씩 빨리, 내일 기다리며 살아 #미리 내려놓는 준비하면 좋을 듯

인간 안재욱에겐 가식이 요즘 말로 ‘1도 없었다’. 지나간 이야기는 하기 싫다며 뾰로통한 표정으로 나타났고, 작품에 대한 애정보다 불편함을 먼저 드러냈다. “이 노래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까칠해 보여도 속정이 깊다’는 첩보대로, 조금 낯을 익히자 이내 사람좋은 미소와 함께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놨다.

죽음 앞에 서다

지난달 27일 쉐라톤 서울 디큐브시티 호텔에서 진행한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안재욱은 ’어제를 돌아보며 후회하기 보다 내일을 한발씩 먼저 준비하고 기다리며 산다“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지난달 27일 쉐라톤 서울 디큐브시티 호텔에서 진행한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안재욱은 ’어제를 돌아보며 후회하기 보다 내일을 한발씩 먼저 준비하고 기다리며 산다“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임종 1분 전 천국의 계단 앞에 선 주인공 명우는 곧 안재욱 자신이기도 하다. 2013년 미국여행 도중 갑작스런 지주막하출혈로 죽을 고비를 넘긴 그다. “비행기가 추락했는데 살아난 셈이래요. 뇌혈관 어디가 꽈리처럼 부풀어 올라있다가 순간 터져버린 건데, 내가 받은 수술이 30%는 즉사, 30%는 뇌사, 30%는 평생 장애, 나같이 멀쩡한 경우는 7% 이내래요. 지금은 술담배 다 하고 괜찮아요. 의사들끼리 하이파이브할 정도로 성공적 수술이었죠.”

의식을 잃자 영혼이 어딘가로 가던가요.
“영화 같은 상황은 아니예요. 호텔에 혼자 있는데 갑자기 주먹만한 사과 하나가 가슴에 걸린 느낌? 헛구역질을 하는데 뒷목이 ‘쩍’하더군요. 마침 일행한테 전화가 와서 응급처치가 빨랐어요. 그때 의식 잃었다면 그냥 죽었겠죠. 병원에서 머리를 절개해야 된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일행들은 ‘이 사람이 배운데 절개 밖에 없느냐’고 오열했지만, 전 오히려 받아들였어요.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던 거죠.”
죽다 살았으니 인생관이 바뀌었겠어요.
“당시엔 화만 나더군요.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한 달 가까이 중환자실에 갇혀 성질만 부렸는데, 귀국 비행기 안에서 ‘내가 뭔가 해야 될 일이 더 있구나’ 싶었어요. 그냥 가기엔 빼먹고 산 게 많았나보다. 복귀하고부터는 오히려 일을 더 많이 해요. 작품 하나 하면 1년 쉬는 식이었는데, 소중한 시간 얻었으니 내 재주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여드려야죠.”
그 후 뮤지컬에 집중하는 것 같은데.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모습보다 내가 직접 나 자신을 확인하고 싶달까요. 무대에서 느끼는 성취감과 보람에 푹 빠져있죠. 그래서 대충하는 애들 보면 화가 나요. 이게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모르고 그냥 도장 찍듯이 와서 대충 때우는데, 나처럼 혼자 고민 많이 하는 사람만 피곤해지죠. 그래서 더 지치네요.(웃음)”
죽기 1분 전에 언제로 돌아가고 싶나요.
“대학 1학년 때? 중고등학교 때는 이게 내 생활인지 누구 생활인지 몰랐어요. 고3 2학기에 갑자기 예체능으로 바꿨는데, 동국대 떨어진 충격이 엄청났어요. 크리스마스 이브날 발표가 났는데, 그렇게 고집 피워 얻어낸 걸 보란 듯이 떨어져 진짜 창피했죠. 오히려 잘 몰랐던 서울예대에 들어갔는데 전국의 ‘또라이’가 다 모였더군요. 하루하루 너무 재미있어서 매일 아침 7시 30분에 학교를 갔어요. 매일 지각하던 내가 같은 애가 맞나 집에서도 놀랐죠.”
뭐가 그렇게 좋았나요.
“다들 재주꾼이었으니까요. 류승룡 ·황정민·정재영 등 대여섯명 멤버가 있는데, (신)동엽이가 많이 튀었죠. 정말 ‘드럽게’ 웃겼어요. 머리 좋고 속 깊은 친구들이 많았고, 가장 나다운 열정이 있던 시절인 것 같아요. 근데 후배들 들어오면서 재미가 없더군요. 후배들이 내 말을 잔소리로 듣는 거예요.”
정성화씨 등 후배들을 거둬먹였다던데.
“걔네는 이제나 돈내고 먹을 줄 알지, 딱 거지였어요.(일동 박장대소) 애낳고 먹고 싶은 거 사먹는 거 보면 대견할 정도죠. 나는 졸업하면서 바로 공채시험 붙고 수입이 생겼는데, 동료들은 10년 가까이 고생들 했으니까요. 나는 밖에서 일하고 있는데 우리 집 앞에서 고기 먹고 우리 집에서 자고, 다음날 내 옷 입고 가버리는 식이었죠.”

첫사랑보다 끝사랑

서울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광화문 연가’에서 열연하고 있는 배우 안재욱(가운데) [사진 CJENM]

서울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광화문 연가’에서 열연하고 있는 배우 안재욱(가운데) [사진 CJENM]

‘광화문 연가’는 첫사랑의 기억을 더듬는 중년 남자의 추억 여행이다. 하지만 결국 소중한 기억은 아내에 관한 것이었다는

‘여심저격 코드’가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아내가 됐든 누가 됐든 지금 너의 마지막 빈 집의 주인공은 머릿속에 막연하게 그렸던 순정 로맨스가 아니라 너의 현실을 채워준 사람 아니었어? 라는 물음인데, 처음 대본 봤을 때 이거면 될 거다 싶었어요. 음악에 빠져 살면서 늘 다른 여자 생각을 하니까 아내가 늘 돌아서 있었고, 나 또한 평생 그 돌아선 모습을 보고 살았다는 게 너무 짠하더군요.”

너무 남자 입장에서 이상적인 아내를 그린 것 같아요.
“나는 저렇게 못 살 것 같다면서도 주변에 저런 부부가 있는 것 같다고는 해요. 남자가 잘못했죠. 근데 행복한 부부라면 작품이 안 되겠죠. 코미디라면 가능하겠네요. 여보, 오늘 행복한 밥상을 차려줘서 고마워. ‘내 곁에만 머물러요~’(노래). 얘야, 오늘 너무 밤늦게 다니지 마라. ‘붉게 물든 노을~’(노래). 이게 더 재밌겠는데?(웃음)”
늦게 만난 아내를 그렇게 사랑한다구요.
“첫 느낌에 웃는 모습이 예뻤어요. 수술 받고 나서 내가 결혼이라는 큰 책임감이 어울릴까 고민도 했는데, 운명이란 생각이 들었죠. 처음엔 놀라더군요. 그래서 당황스럽겠지만 좀 지나면 당연히 사귀고 있을테니 그리 알라고 했죠.(웃음)”
‘한류 1호’로 살았으니 덕수궁 돌담길 같은 평범해서 낭만적인 추억은 없겠어요.
“전 지극히 평범한 걸 좋아해요. 27살에 한류 1호라는 타이틀이 너무 싫었죠. 요즘 애들은 뭐가 그렇게 세련됐는지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살지만 나는 너무 부담됐어요. 내가 오늘 인터뷰했다고 기자님에게 내일 다이아반지를 선물하면 어떻겠어요? 주니까 받기야 하겠지만 고민하겠죠. 훌륭한 배우가 되고 싶었지 화려한 삶은 나와 잘 안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최대한 활동도 자제했던 거죠.”

4050 ‘인생노래’의 향연

‘광화문 연가’의 객석 풍경은 2030 여성층이 절대적인 여느 뮤지컬과는 사뭇 다르다. 중년 부부나 동창모임 단체 관람객이 그 세대의 ‘인생 노래’들에 푹 빠져있다 커튼콜엔 당연하게 ‘붉은 노을’이 떼창으로 이어진다. “딱 제가 학생 때 좋아하던 노래들이에요. 이영훈·김현식·들국화를 제일 좋아했고, 18번이 ‘할 말을 하지 못했죠’‘깊은 밤을 날아서’였으니까요.”

중장년 떼창 커튼콜이 좀 낯선 풍경인데.
“전 너무 익숙해요. 제 팬클럽이 다 중장년이니까요. 좋아하는 대상이 다른거지 누군가에 대한 열정은 다 똑같아요. BTS 팬이나 조용필 팬이나 같은 마음이죠. 엄마들도 10대 때는 요즘 애들 같았던 거죠. 지금 5060 엄마들이 옛날 클리프 리차드, 레이프 가렛 왔을 때 속옷 벗어 던지던 사람들이잖아요.”
중년이 되니 나이 먹기가 싫은데요.
“내일은 기다릴 수 있는 거잖아요. 내가 50, 60이 되면 어떨까를 기다리는 재미로 살아요. 20대에는 30살 형이 부러웠죠. 되게 남자같고. 근데 막상 되 보니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30대엔 40이 되면 뭔가 깊이가 생길 줄 알았더니 피곤하기만 하더군요. 형들한테 다 속았던 거죠. 50 넘은 형들은 더 애가 되는 것 같아서 저렇게 안 늙어야지 싶어요. 중년 이후의 삶은 한 발씩 빨리 가야 할 것 같아요. 주인공에 연연하다가 밀려서 가는 모양새보다 미리 내려놓는 준비를 하면 좀 쉽지 않을까요.”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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