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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그 연원을 찾아서|외세 시련으로 갈고 닦은 투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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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제주도는 장수 이야기의 고장이다. 여러 시대에 걸쳐 이루어진 갖가지 장수 이야기가 한라산 봉우리들처럼 누적되어 있다. 경치나 보며 감탄하고 마는 관광객은 짐작도 못할 구비문학의 소중한 유산에 시련과 싸워 온 삶의 의지가 집약되어 있다. 척박한 당에서 거듭된 고난을 견딘 섬사람들이 민족서사시의 오랜 맥락을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잘 잇고 시대마다 새롭게 재창조해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원래 마을마다 신당이 있고 그 신당에 좌정한 신을 섬기면서 마을의 안녕을 비는 굿판을 해마다 벌였다. 그때 부르는 무가 당본풀이는 신이 태어나 시련을 겪다가 당신이 되기까지의 내력을 일정한 순서에 따라 노래하기 일쑤다.
영웅의 일생을 주몽이나 탈해와 비슷하게 전하므로 고대의 건국서사시를 그렇게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사무가는 전국 각처에 전하지만 주인공이 어느 마을의 신으로 자리잡고 다른 마을의 신과 혈통관계를 가지는 곳은 제주도뿐이다. 오랜 전통이 제주도에만 남아있다 하겠다.
제주시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구좌읍 동금령리에 이른다.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 남쪽으로 난 길을 조금 들어서면 자그마한 숲이 있다. 그 속에 돌담을 쌓고 돌담 안 큰 나무 밑에 돌파 시멘트로 만든 제단이 있다. 그 곳이 바로 괴뇌깃당이다. 괴뇌깃또라는 영웅을 신으로 섬기며 그 내력을 풀이하는 서사시를 노래하는 현장이다. 괴뇌깃또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둘 다 지하에서 솟아나 그 근처 상송당·하송당의 신으로 좌정했는데, 주책없는 짓을 일삼아 괴뇌깃또가 뱃속에 있을 때 싸우고 별거했다. 괴뇌깃또는 태어나자 힘이 대단하고 많이 먹어 말썽이었다.

<마을 안녕 위한 굿판>
가까스로 찾은 아버지의 수염을 당기고 가슴을 짓눌렀다고 무쇠 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워지는 벌을 받았다. 그랬더니 동해용왕국에 표착해서 용왕의 셋째 딸과 혼인했다. 너무 많이 먹는다고 거기서도 추방하자 강남천자국에 표착해서 남북적을 물리치고 머리가 여럿 달린 괴물을 처치하는 용맹을 발휘했다.
제주도는 양식이 부족한 곳이라 많이 먹고 장수가 되어 엄청난 힘을 쓰자는 소망을 이렇게 나타낼 만 했다. 안에서의 시련 때문에 바다 밖으로 나가 동해용왕국이니 강남친자국이니 하는 나라를 휩쓸었으면 하는 기대를 키울만 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기대하는바와 달라 바다건너 온 외세가 제주도를 유린했다. 일찍이 1486년 (성종 17년)에 간행된『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제주의 사묘를 소개한 대목에서 중국인 호종단이 제주도 땅의 정기를 누르고 돌아가는데 한라산 산신의 아우가 매가 되어 돛대머리에 날아오르자 배가 가라앉아 죽었다고 했다. 제주도에서는 흔히 고종달이라고 하는 호종단은 행적이 뚜렷하지 않은 실제 인물인데 이야기에서 외세를 상징하는 외국인 노릇을 한다.
고종달이 땅의 정기를 누르고 혈을 질렀다고 해서 외세의 침략을 구체화하고 제주도가 그 표적이 되었다 한다. 한라산 산신의 아우가 민족 수호신 노릇을 해 침략자를 응징했다고 한다.
고종달이 곳곳에 혈을 질러 제주도에는 왕이 ,나지 못하고 마실 물도 부족하게 되었다고 한다. 피해의 현장이라는 곳 가운데 안덕면 사계리의 용머리가 특히 큰 충격을 준다. 용머리는 그 이름에 걸 맞는 모습으로 바다를 향해 솟아 있는 거대한 바위인데 꼬리와 잔 등에 해당하는 곳이 끊겨 있다.
용을 죽여 왕이 나지 못하게 하느라고 고종달이 칼로 내리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수난이 닥칠 때 곁에 있는 산방산이 크게 울었다 한다. 그런데 고종달은 무사히 돌아가지 못하고 산신의 응징을 받아 죽었다 하며 그 자리가 한경면 앞 바다 차귀섬 근처라고 전한다.
고종달이 제주도에 와서 혈을 질렀다는 이야기는 고려말 께에 형성되었으리라고 생각되고 몽고군의 침입에 따른 수난을 간접적으로 나타냈을 수 있다.

<20년 동안 몽고 복속>
실제의 역사와 바로 연결된 전실은 김통정 장군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김통정은 삼별초 군을 이끌고 몽고에 대항하다가 1272년 (고려 원종 12년)에 근거지인 진도가 함락되자 제주도로 들어와 애월읍 고성리 항바들이에다 성을 쌓고 이듬해까지 싸웠다. 김통정이 패배하자 제주도는 20여년 동안 몽고에 직접 복속되는 시련을 겪었다.
김통정은 어머니가 지렁이와 관계해서 남은 자식인데 온몸에 비늘이, 겨드랑이에는 날개가 돋았다하며 비범한 영웅으로 이야기되고 용맹과 지모가 뛰어났으면서 패배하고 만 것을 아쉽게 여긴다. 흉년이 들어 고생하는 백성들을 동원해 성을 쌓았다고 원망하는 말이 전하고 안덕면 덕수리 광정당신 본풀이에서는 당신의 공격을 받고 죽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김통정을 숭앙해야 할 영웅으로 받드는 전승 또한 만만치 않다. 고성리 항몽추적지에 가면 장수물이라는 샘물이 있는데, 김통정이 몽고군과 함께 온 김방경과 싸우다 죽으면서『내 백성일랑 물이나 먹고살아라』면서 발로 바위를 찍자 물이 솟기 시작했다 한다.
그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내리에 가면 김통정을 신으로 모신 당이 있다. 거기다 제물로 바친 비단 보자기에「삼천백마」라고 쓴 문구가 있다. 3천 필의 백마를 타고 군사를 다시 일으키라고 기원한 것이다.
이야기에 오르는 장수는 후대에도 계속 태어났다. 조선조 숙종 때에 이좌수라는 인물이 서귀포시 중문리 무우남밭이란 곳에 살았다 한다. 이름은 은성인데 대정현 좌수를 지냈기 때문에 이좌수로 알려졌다. 이야기는 실제 인물에 관한 실화 같은데 예사롭지 않게 전개된다. 이좌수는 언제나 눈을 반쯤 감고 다녔다. 눈을 치켜 뜨면 나는 새도 놀라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사또가 눈을 뜨라고 하다가 자빠지고 말았다.

<능력 못 살린 한 서려>
당시에 제주에는 나라에서 기르는 국마를 빙자해 백성을 수탈하는 못된 관행이 있었는데 이좌수가 그 내막을 제주목사에게 고해 공모한 관원들을 하옥하게 했다 한다. 남은 패거리들이 달려들었으나 눈을 부릅뜨니 다 도망갔다. 그런 이좌수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하고 70년만에 이장을 하면서 보니 눈을 대접만 하게 뜨고있고 시체가 썩지 않았다 한다.
이좌수의 친구인 중문면 대포리의 원형방이라든가 하는 아전출신의 장수·이인이 여럿 있었다지만 크게 이룬 일없이 일생을 마쳤다. 제주도 토박이로서는 그 이상 어떻게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구좌읍 한동리에 살았다는 장수는 본명은 김용우인데 사는 마을의 옛 이름이「괴」요, 눈이 범 같다 해서「범」이란 말을 넣고 천총 벼슬을 지낸 것을 들어 괴범천총이라 했다 한다.
제주목사가 마을을 돌아보느라고 행차를 하면 일행과 함께 밭으로 지나 농사를 망치는 일이 흔히 있었다. 한번은 괴범천총이 처가에 가니 장인이 그 때문에 걱정을 했다. 장인을 안심시키고 발 어귀에 앉아 기다리다가 눈을 한번 치켜 뜨니 목사 일행이 이리저리 흩어져 멀리 돌아가더라고 했다. 엄청난 능력을 마땅하게 쓰는 방법은 찾지 못했다. 귀신과도 대결하다가 자기 집이 불타게 되는 것을 미리 알았지만 막지는 못했다.
남원읍 의귀리의 논하니, 중문리의 막산이는 남에게 매인 종이면서 힘이 대단한 장수였다. 배불리 먹을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라, 논하니는 일꾼 쉰 명의 밥을 혼자서 먹고 쉰 명이 할 일을 다 했다. 막산이는 너무 많이 먹는다고 이 집 저 집에서 쫓겨나더니 지나가는 마소를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도 굶어 죽었다 한다. 엄청난 능력을 썩이면서 좌절을 거듭해 온 역사를 그렇게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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