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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 기피 대상 680만여 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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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인천에서 유통업체를 운영했던 양모(44)씨가 서울 서초동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파산 신청서를 쓰고 있다. 금융회사 대출을 외면해 고금리의 사채를 썼던 상당수의 서민은 결국 파산으로 내몰린다.

금융회사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빈곤층.실업자만이 아니다. 경제활동인구의 30%와 맞먹는 680여 만 명의 '금융 약자' 상당수는 평범한 직장인과 자영업자였다. 취재팀이 서민 대출 중개기관 '이지론(egloan.co.kr)'과 공동으로 올해 대출을 거절당한 5000명을 분석한 결과 직장인이 45%, 학원강사와 같은 기타 소득자가 25%, 자영업자가 7%였다. 대다수는 과거에 한두 번 연체했을 뿐, 빚을 갚지 않는 금융 채무 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가 아니었다. 대출을 못 받는 사람들은 사채 등 고리대로 빠져 든다. 현대경제연구원 박덕배 연구위원은 "어느 정도의 금융 지원으로 구제될 수 있는 사람까지 불법 사채 시장으로 내몰리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멀쩡한 직장인도 까딱 잘못하면 '금융 약자'가 되지요. 불량 정보에만 의존해 대출을 제한하는 금융기관의 제도.관행 때문입니다. 신용불량의 늪에 빠지면 금융 서비스는 완전히 단절됩니다." (박창균 KDI 연구위원)

컴퓨터업체에 다니는 김모(29.여)씨는 사회 초년생 때 한 번 신용의 늪에 빠졌다가 회복하는 데 값비싼 수업료를 치렀다. 2002년 친구에게 1000만원을 빌려줬다가 떼이면서 생긴 빚을 해결하는 데 5년이 걸린 것이다. 인터넷 대부업체에서 대출받아 빚을 막으려고 한 게 잘못이었다.

'위험 업종(대부업체) 대출 조회 건수가 많다'는 이유로 은행 대출이 막혔다. 카드사는 사용 한도를 절반으로 줄였다. 인터넷 대출 신청을 할 때 한꺼번에 3~4개 대부업체가 김씨의 신용 상태를 조회했기 때문이었다. 조회 수가 쌓여 신용등급은 최하위로 추락했다. 다시 대부업체에서 연 66%의 고금리의 급전을 빼 카드 빚을 막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결국 5년간 고리(高利)를 꼬박꼬박 부담하고, 적금을 타 대출금을 갚은 뒤에야 김씨의 신용등급은 10등급 중 6등급으로 회복됐다.

취재팀이 5000명을 분석한 결과, 금융 약자들의 1인당 연소득은 2300만원, 부채는 3100만원으로 조사됐다. 빚이 소득보다 800여만원 더 많다. 상당수는 빚이 빚을 낳는 악순환에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추가로 필요한 자금의 용도로 사업자금(21%)에 이어 기존 부채 상환(19%)을 꼽았다. 다섯 명 중 한 명꼴로 빚을 내 빚을 막고 있는 것이다.

"800만 명의 자영업자는 금융 서비스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소득 정보가 없어 신용도를 낮게 평가받기 때문이죠. 실제 1000점 만점의 신용평점이 국민 전체 평균은 740점인데 자영업자는 680점입니다."(한국신용정보 강영구 CB운영실장)

경기도 의정부에서 수퍼마켓을 하는 이모(55)씨는 금융회사가 기피하는 대상이다. 자영업 경기가 나빠지면서 은행은 물론 서민금융회사들도 사업자금 대출을 거절했다.

"6~7년 전 장사가 잘 될 때는 거래 은행에서 예금도 많고, 거래 실적이 좋다고 VIP 대우를 해줬어요. 요즘엔 새마을금고도 '자영업자 신용 대출 상품은 없다'고 잘라요."

이씨는 결국 필요한 사업자금을 친구 소개로 알게 된 대부업체에서 융통해 썼다. 66%의 이자율로 1000만원을 빌리는 데 수수료로 180만원을 뗐다. 이씨는 "영세 자영업자들이 경기가 나쁘기도 하지만 고리대에 치여 죽게 생겼다"고 말했다. 취재팀이 대출 거절자 150명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연리 100~300%대의 불법 사채를 이용한 경험자가 35.3%에 달했다. 이 같은 불법 고리대가 금융 약자를 파산으로 내모는 것이다.

"금융회사에서 내몰린 사람이 갈 곳은 뻔합니다. 대부업체나 불법 사채업자뿐입니다. 통상 금리의 10배가 넘는 금융비용을 감당할 서민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김관기 서강대 교수.법학)

인천의 주부 이모(31.여)씨는 반년째 사채업자를 피해 친정에서 숨어 지내고 있다. 6년 동안 지하상가에서 액세서리점을 하면서 사채를 빌려 쓴 것이 화근이었다. 처음엔 한두 군데에서 200만~300만원씩 빌려 가게 운영자금으로 썼지만 수수료를 합쳐 월평균 10%의 이자를 물다 보니 사채 빚이 15군데에서, 4000만원으로 불어났다. 빚을 감당하지 못해 지난해 말 가게는 폐업했다.

이씨는 "이자만 3000만원을 갚았지만 원금은 줄지 않았다"며 "장사도 안 되는 상황에서 빚만 늘어나니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장사를 접자 사채업자들의 채권 추심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전화 욕설은 보통이고, 남편과 친지에게도 빚독촉이 뒤따랐다. 1월에는 사채업자들의 고소로 경찰 수사까지 받게 됐다. 지난달 경찰 수사 결과 '무혐의' 통지를 받은 뒤 이씨는 파산 준비에 들어갔다. 남편과 다른 가족에게 채권 추심 피해를 계속 당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이씨는 "사채업자들이 가만히 안 있을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2000년 329명에 불과하던 법원의 개인 파산 신청자는 지난해 3만8773명으로 5년 만에 100배 이상 불어났다. 이 같은 추세라면 올해 1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금융회사들은 신용회복프로그램 이용자를 '특수기록' 관리대상에 올려놓고 대출이나 신용카드 발급을 제한하고 있다. 경원대 홍종학(경제학) 교수는 "한번 신용불량의 늪에 빠진 사람은 금융회사에 기록이 남기 때문에 사채 같은 약탈적 대출의 피해만 보다 다시 신용불량자가 되기 십상"이라고 말했다.

가계대출 늘었다지만
아파트 담보대출이 60% 차지
서민 위한 소액 신용대출 외면

2001년 이후 전체 금융회사의 가계대출은 249조원에서 500조원으로 늘었다. 5년 만에 250조원에 달하는 엄청난 돈이 풀린 것이다.

그러나 실상을 따져보니 이 돈은 부동산시장에 풀렸지, 서민대출은 오히려 외면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금은행의 주택담보대출이 같은 기간 55조원에서 190조원으로 140조원 늘었다. 대출 증가분 중 60%는 은행의 아파트 담보대출이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서민금융회사라는 상호저축은행의 주택담보대출도 7000억원에서 지난해 말 4조3800억원으로 여섯 배가 됐다. 반면 서민이 애용하는 상품인 300만원 이하의 소액 신용대출은 2002년 말 2조8000억원에서 절반 이하로 줄었다.

취재팀이 한국신용정보와 함께 분석한 결과에서도 신용등급이 낮은 사람의 돈줄이 막힌 양상이 뚜렷했다.

은행의 2003년 3분기~2005년 4분기 신용등급 7등급 이하 자에 대한 신규 대출액은 3조2456억원에서 1조7430억원으로 줄었다.

카드업권은 2조3860억원에서 3090억원으로 8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다. 카드 부실의 여파 때문이었다. 저축은행과 상호금융 역시 같은 기간에 낮은 신용등급자에 대한 대출 규모를 각각 종전의 66%와 71%로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금융연구원 정찬우 연구위원은 "2001년 신용 대란 이후 담보 없는 서민이 금융회사를 이용하지 못하고 사금융의 피해를 보는 양상이 지속되고 있다"며 "시장 차별화로 서민의 금융서비스 접근 기회를 늘려 줘야 한다"고 말했다.

▶ 취재= 허귀식.정효식.천인성 탐사기획부문 기자
▶ 사진= 변선구 편집사진부문 기자
▶ 제보= 02-751-5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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