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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만들어 줬지만…제조업체 96% "한국 돌아가 사업 안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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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엘리베이터 제조사 오티스는 2012년 멕시코 생산공장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로 옮겼다. 당시 지방 정부는 본국 유턴 기업(해외로 나갔다가 본국으로 돌아온 기업)에 30년간의 재산세 감면 등 파격적인 혜택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회사는 유턴 초기에는 납품 지연과 주문 취소가 잇따르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낙후 지역으로 꼽히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선 협력업체는 물론 숙련 노동자도 구하기도 어려웠던 탓이다. 그러나 지난해부터는 이 회사의 귀환 작업이 성공적으로 안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양금승 서울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수입 제품엔 관세를 부과하고, 자국 내 기업엔 법인세 감면 혜택을 부과한 트럼프 행정부의 기업 유치 정책 때문에 미국으로 유턴하는 기업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일본·독일 등 선진국에선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있는 기업 유턴 정책이 한국에선 표류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대기업이라도 국내로 복귀하면 중소기업 수준의 보조금 지급(최대 70억원)·법인세 감면(최대 5년 전액 감면)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대기업 반응은 싸늘하다. 국내 대형 제조업체 상당수는 한국에서 사업할 의향이 없는 것으로 조사된 것도 이를 방증한다.

28일 한국경제연구원이 시장조사기관 모노리서치에 의뢰해 해외 사업장이 있는 중견 이상 제조업체 150곳에 설문을 받은 결과에 따르면 국내 U턴을 고려 중인 기업은 2곳(1.3%)에 불과했다. 해외 사정이 악화하면 유턴을 고려할 수 있다고 밝힌 4곳(2.7%)을 제외하면 전체 기업의 96%가 한국으로 사업장을 이전할 계획이 없다고 밝힌 것이다.

이들이 국내 복귀에 시큰둥한 이유는 한국보다 해외 시장에서 할 일이 더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체 기업의 77.1%가 '해외 시장 확대'를 유턴을 고려하지 않는 이유로 꼽았다. 국내에서의 고임금 부담(16.7%)과 노동시장 경직성(4.2%) 등도 상당수 기업이 선택했다. 전반적인 시장과 규제 환경이 기업 눈높이에 맞지 않는 것이 국내 유턴을 꺼리는 주된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문종철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복귀 이후 기업이 사업을 본 궤도에 올릴 수 있게끔 돕는 사후관리 대책은 그동안 간과돼 왔다"며 "정책 평가도 유턴 기업 유치보다는 재정착 성공 실적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는 시기에는 발 빠른 기술 확보가 중요하기 때문에, 기업 복귀 전략도 새롭게 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과거 국내 제조업체들은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중국·동남아 등지로 생산 기지를 옮겼지만, 앞으로는 첨단 기술 연구개발(R&D) 센터와 스타트업이 밀집한 곳으로 몰려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최혜린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독일은 스마트팩토리, 대만은 R&D 지원 정책 등으로 기업 유턴을 유도하지만, 한국은 보조금·세제 혜택 외에 R&D 관련 지원은 없는 실정"이라며 "혁신을 가로막는 규제 완화 등으로 R&D 투자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해야 경쟁력 있는 기업을 유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29일 국무총리 주재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유턴기업 복귀 지원 종합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정부가 지난달 밝힌 것처럼 대책은 법인세 완화, 금융 지원 등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보인다. 기업들이 경직된 노동시장 개혁과 규제 완화 등을 국내 복귀의 최우선 과제로 꼽고 있는 것과는 상반된다.

유환익 한국경제연구원 상무는 "세제 등 직접적인 지원 제도를 확충하는 것보다 노동시장과 규제 환경 등 전반적인 경영 여건을 개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한국의 비싼 인건비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환경 개선이 이뤄져야 기업 유턴도 늘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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